길 스캇 헤론 (Gil Scott-Heron) 인터뷰 - 2

링컨 대학 시절에 브라이언 잭슨이나 미드나잇 밴드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당시 저는 빅터 브라운이라고 하는 보컬리스트와 함께 일하고 있었는데요. 우리는 캠퍼스의 커피 숍 같은 데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했어요. 하루는 연습실에서 그 친구를 위해 곡을 쓰고 있었는데요. 브라이언은 우리 옆방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빅터에게 말했죠. “내가 여기서 연주하는 것을 봤다는 게 저 친구야. 저 친구한테 피아노를 맡겨보는 게 어때?” 저는 브라이언을 빅에게 소개시켜줘서 잠깐 몇 곡을 맞춰보도록 했죠. 브라이언은 가사를 붙이면 좋을 만한 곡들을 좀 써놨다고 했고요.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는 함께 하기로 했죠. 그 친구가 가져온 몇 곡들은 정말 괜찮았어요. 결국 함께 음반 계약을 맺었어요. 브라이언은 밥 틸리처럼 음악가였기 때문에 세션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악곡들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했나요?
음악이 늘 먼저죠. 브라이언이 먼저 곡 작업을 하면 그 곡을 쓸 때 어떤 느낌인지에 대해 얘기를 나눕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제 작업이 출발하는 거죠.
어떤 점에서 두 분이 그렇게 잘 맞으셨나요?
저희보다 훨씬 더 뛰어난 파트너십이 있어왔지만 저희도 서로 꽤 잘 맞았습니다. 음악이 독특했어요. 곡들이 재즈나 고전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그런 뿌리에 대해 조예가 있는 작사가가 있었지요.
당시는 물론이고 헤론 씨의 모든 음악 경력을 통틀어서, 진중한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든 적이 있습니까?
만나보신 모든 작곡자들이 다 그런 메시지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갖고 있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몇몇 사람들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문제는 그런 메시지가 잘 먹혀들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죠.
1974년에 <Winter in America>를 녹음하시기 전에, 브라이언 씨와 몇몇 다른 밴드 멤버들과 함께 워싱턴 D.C.에 가셨죠? 무슨 일 때문이었습니까?
가르치러 갔습니다.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마치고 볼티모어를 떠나 UDC (워싱턴 D.C. 대학)에서 시, 소설, 창조적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었거든요. 브라이언이 따라와서 음악 작업을 계속했죠.
그 도시가, 아니면 그 도시의 환경이 <Winter in America>에서 수록된 가사들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나요? 그 노래들을 쓰시면서 염두에 두셨던 특정인이 있다든가.
네, “The Bottle”은 제 숙소 근처 주차장에서 어울리던 몇몇 사람들에 대한 곡입니다. 그 사람들은 주차장에 모여서 전날 밤에 모은 술병들을 내다팔아 다시 술을 사곤 했지요. 리커 스토어 (술을 판매하는 잡화점)를 경영하는 사람이 뒷문을 열고 술을 주었습니다. 저는 몇 번인가 그쪽에 가서 말을 걸어보려고 했어요. 뭐하는 사람들인지, 또 무엇들을 하는지 궁금해서요. 그 사람들의 친구 몇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계절이 오건 말건, 날씨가 어떻건 그 사람들은 내내 그 자리에 나와 있었는데, 이게 참 마음이 끌리더라고요. 그 한결같음에 매료되었습니다.
뭐하는 사람들이고, 무슨 일을 하던가요?
한명은 전직 의사였습니다. 당시에 낙태는 불법이었는데요. 그 사람은 몇 번인가 수술을 해줬고 누가 그 사람을 고자질해서 면허를 잃게 되었죠. 면허를 잃으니까 아내도 잃고, 아내가 애들까지 다 데려 가버렸어요. 잃은 면허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니까 삶이 막장이 된 거죠. 몇 사람이 간청해서 낙태수술을 하도록 만들었어요. 한 여자는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여자였는데 어떤 사람을 마약 중독에서 헤어 나오도록 돕게 되었죠. 그 여자는 자기가 하는 일마다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 데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전부 비극적인 인물들이었어요. 그래서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거죠. 또 다른 한 사람은 항공 관제사였는데 항로를 잘못 인도하는 사고를 쳤죠. 해군 제트기 두 대였는데요. 그 중 한 대를 고도를 낮추게 했는데 그 비행기가 산 옆구리에 박은 거예요. 그래서 4명이 죽었다네요.
알코올 중독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살다보니 그 길로 빠져들게 할 만한 일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에는 의사가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중독을 질환으로 진단하는 게 옳은 일이었어요. 사회적 감수성(social feeling)이나 개인 성격의 약한 측면이 아니라. 그렇게 그 사람들 일에 끼어들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뭔가가 필요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Winter in America>는 어두운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 지금 미국 상황도 좀 어두운 시가라 하겠는데요. 요즘 들어서 사회 상황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물론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세상이 변하고 있어요. 당시 미국은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왜냐하면 뭔가 긍정적인 역할을 해보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을 전부 잃었었거든요. 케네디 가의 사람들, 말콤 엑스,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메드가 에버스 (역자 주 – 미시시피에서 살해된 흑인인권단체 NAACP의 활동가) 등 모두가 살해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겨울이 오고 있다는 표현을 쓰려고 했던 거지요. 어둠이 빛을 가릴 수는 없다지만. 우리에게 밝은 햇살을 가져다 주려던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버렸었지요.
당시 헤론 씨의 언급 중 일부인데요. 미국은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 이 얘기는 지금도 꽤 시의적절하네요.
우리 미국인들에게는 다른 나라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과거에도 필요했고 여전히 필요합니다. 미국은 매우 거만하고 매우 추악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무례하기 이를 데 없죠. 우리는 오랜 동안 세계 전 방위에서 활동해왔고, 또 수천 년 동안 지켜오던 나라들을 그 터전에서 내쫓으려 하고 있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매우 명백해 보입니다. 우리 미국인들은 모두로부터 떠받들어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그런 거만함이 지배하던 시기가 있었죠.
클라이브 데이비스와는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그냥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엔가 비컨 극장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저희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나온 사람이 저희가 좀 만나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클라이브 데이비스였어요. 그 사람은 아리스타 레코드를 시작하면서 노래를 쓰거나 프로듀싱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더군요. 클라이브는 맨주먹으로 시작한 사람이라 프로듀서나 A&R 맨도 아직까지 없던 상태였지요. 그래서 새 앨범 작업을 거기서 했는데, 그게 바로 (1975년 작인) <The First Minute of a New Day>입니다. 클라이브에게는 그게 새 사업의 첫 앨범이었거든요. 그 사람은 앨범 앞면의 고릴라를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게 그 사람 사업이었으니까요.
그 분이 헤론 씨 밴드 멤버들에게 꽤 잘했나 보네요. 그리고 그 분이 “흑인 밥 딜런”이라는 콘셉트를 엄청 밀었고요.
그때 밥 딜런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 분이 쓴 곡을 몇 곡 들어봤었죠. “Just Like a Woman”하고 “Like a Rolling Stone”이요. 두 곡 다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되려고 원하는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관한 한, 그런 맥락에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클라이브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우리 작업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거라고 말했다네요. 제게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딜런은 하모니카를 불었고 저는 피아노를 연주했어요. 딜런은 노래를 못 불렀지만 저는 잘 불렀지요. 당시에 우리 둘은 그렇게 달랐습니다.
<Last Holyday>라는 책을 탈고하셨는데,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생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려는 스티비 원더의 활동에 대해 나오더군요. 스티비의 전국 투어가 이 공휴일 지정을 현실화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십니까?
그 일로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 같아요. 스티비의 공연 투어와 캠페인 덕이고요. 저도 참여시켜주어서 기꺼이 참여했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바꾸고 싶다면 법을 바꿔야 합니다. 결국 이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어요. 방화를 하고 건물을 파괴하고 광기를 분출하거나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법을 바꾸기 전까지 이 나라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스티비 원더는 법을 바꿔서 국가 공휴일을 만들려고 했고 결국 그리 됐잖아요? 저는 스티비가 이런 공로에 대해 응당한 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잘 이해한다고 보시나요? 특히 가사에 대해서요. 아니면 당신이 노래를 통해 교육을 하려한다든가 정치적인 태도를 보이려고 한다거나 아니면 교육인지 선동인지 헷갈려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모든 행위들이 얼마간 정치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아요. 하지만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일들에 세금이 붙죠. 그리고 그 세금은 이 정치 공동체를 부양하고요.
징세 반대론자이십니까?
아뇨. 저는 세금은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어디에 세금을 쓰는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 그 세금이 사람 죽이는 데는 쓰이지 않았으면 해요. 저는 군대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는 겁니다. 차라리 좋은 곳에 세금을 썼으면 좋겠어요. 미국인들이 자기 세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았으면 해요. 저는 세금을 교육에 썼으면 합니다.
NBA 농구선수 카림 압둘 자바가 헤론 씨 결혼식 때 들러리 (best man)를 서줬다고 하던데요. 맞나요?
네. 제 아내도 그 친구가 소개시켜 줬는걸요. 그 친구는 뉴욕에 있는 딕컴 하우스에 살았고 농구도 같이 했죠. 그 친구가 UCLA에 입학했을 때 수업을 같이 듣던 여학생이 제 아내가 되었습니다. 우리 밴드가 그 친구 있는 데에 가서 음악 작업을 하곤 했거든요.
어떻게 카림을 상대하셨나요?
다른 사람들 하는 거와 똑같죠. 제 키가 6피트 3인치 (189cm 정도)였는데요. 저희가 밴드를 시작했을 때 카림이 록시 (클럽)에 가끔 와서 퍼커션 자리에 앉곤 했어요. 정말로 그 친구가 저희 앨범을 듣고 있었는데 (제 전처인) 브렌다 (사이크스)가 카림네 집에서 그걸 듣고는 저를 보고 싶다고 했답니다. 그렇게 만나서 결혼을 했고 카림이 들러리도 서줬어요. 저희는 웨인 쇼터, 그러니까 웨더 리포트의 계신 분 말예요. 그 분 집에서 결혼했어요. 황홀한 밤이었죠. 카림은 훈련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 가봐야 해서 밤 11시에 떠나버렸어요. 그래도 결혼식은 수월하게 진행됐죠.
새 앨범 <I’m New Here>에서 카니예 웨스트의 “On Coming from a Broken Home”을 샘플링하셨습니다. 샘플링을 당하시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곡을 샘플링하실 때가 더 나으신지요.
특별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말콤 세실하고 작업했는데 그 친구가 샘플링을 할 수 있는 장비들을 만들었어요. 리처드 (러셀)은 재미있다고 생각했고요. 그 친구는 우리를 샘플링하고 우리는 그 친구를 샘플링하고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4년 <Spirits>에 실린 “Message to the Messengers”에서 래퍼들에게 책임감을 가지라고 말씀하셨는데요. 힙합이나 래퍼들과의 관계가 좀 바뀌었다고 보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요새 힙합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저는 래퍼 개개인만을 알고 있을 뿐이죠. 모스 뎁을 알게 되었는데 좋은 친구더라고요. 우리는 카네기 홀에서 같이 공연도 했고요. 커먼, 카니예 웨스트 같은 친구들은 정말 잘하고 있어요. 각각 나름 유명한 친구들이고요. 사람이 25살일 때 전 생애를 평가할 수는 없잖아요. 이제 힙합은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순조롭게 발전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래스트 포이츠 (길 스캇 헤론과 함께 힙합의 비조로 꼽히는 랩 그룹 – 역자 주.)의 멤버와 얘기한 게 생각납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이 일을 시작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힙합이라는 현상을 보시게 되셨는데, 더 많은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는 게 기쁘고 믿음직해보이시나요?
네. 기쁘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듣고 있던 최근의 래퍼가 했던 멋진 말을 따라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자기의 목소리를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15/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