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Funk> 2-3 - 흑표범당 Pt.1

Baron Samdi 2016. 6. 24. 13:55

흑표범 당(黨)


“자기 방어를 위한 흑표범 당The Black Panther Party for Self-Defense"는 1966년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서 메리트 대학의 학생이던 휴이 P. 뉴튼Huey P. Newton과 바비 실Bobby Seale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들의 계획은 흑인 공동체의 치안 유지와, 건강관리와 교육을 위한 활동적인 공동체 센터 활동 그리고 미국 흑인들이 이끄는 불가피한 흑인 혁명을 포함한 흑인 해방에 대한 원대한 계획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몇 달을 경찰들을 쫓아다니면서 (흑인들을) 체포하는 경찰들에게 형법 조항을 소리 내어 읽어주고, 오클랜드 지역에서 경찰들을 소규모로 쫓아다니도록 했으며, 이 문제를 국가적 사안으로 이끌었다.

흑표범당이 전국 방송을 탄 것은 흑표범당원들이 1967년에 어두운 색 가죽 재킷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소총으로 무장하고 캘리포니아 주 의회로 걸어 들어와 청중에게 자신들의 요구조항을 발표하면서부터다. 그들의 연설은 깜짝 놀랄만한 도전적인 자세로 끝맺고 있다.

사악한 경찰견들, 채찍을 든 소몰이꾼들 그리고 점점 불어나는 순찰차들은 흑인 거주구역에서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시청 공무원들은 점증하는 공포로부터 안식을 갈구하는 흑인들에게 귀를 닫고 있다. 자기 방어를 위한 흑표범당은 흑인들 스스로가 더 늦기 전에 이러한 공포에 맞서 무장할 때가 왔다고 믿는다.

무장한 흑인이라는 관념은 미국 사회 체제에 전 방위적인 충격을 몰고 왔다. 흑표범당의 지부가 전국 30여개의 도시로 뻗어나가자, 1969년 미 연방수사국 (이하, FBI) 국장 에드가. J. 후버는 흑표범당을 일컬어 “국가 안보에서의 미국 제일의 위협”이라고 했다. 흑표범당은 이내 경찰과의 빈번한 충돌에 휘말렸고, FBI 정보원들이 조직에 침투하여 지도부를 배신하고 기습하고 투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요 메시지는 명백했다. 흑인 전사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계획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힘은 분명하고 매혹적인 것이었다. 1831년에 냇 터너Nat Turner의 노예 반란 이후에 아마도 최초로 흑인들이 - 특히 흑인 남성들 - 자신과 민중들을 위해 싸울 수 있는 흑인 민족의 중추와 같은 공간이 생겼다. 흑표범당은 미국 흑인들의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참조점이 되었다. 흑백이 차별받지 않는 환경에서 “블랙 파워를 어떻게 보는가?”하는 질문은 실제로 “당신은 그들에 속하는가?”를 의미했다.

흑표범당의 유산은 훵카델릭의 1979년 앨범 <Uncle Jam Wants You>(역자 주 - 미군 징병 포스터의 “Uncle Sam Wants You”를 패러디한 제목)의 음반 표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포스터는 휴이 P. 뉴튼이 중앙에 앉아 있는 유명한 흑표범당 포스터와 같은 형태의 디자인으로 조지 클린턴이 뉴튼의 자리에 앉아 있다. 랩 프로듀서인 엑스 클랜X-Clan의 클로드 “패러다이스” 그레이Claude "Paradise" Gray는 흑표범당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훵크를 만들어낸 환경이 흑표범당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다. 흑표범당은 같은 이치로 창조된 것이다. 그것(그 이치)은 바로 반란이다.”

미국의 체제에 대결적 자세를 취했다는 면에서 흑표범당은 혼자가 아니었다. 1966년에는 수십 차례였던 도시폭동이 1967년이 되자 백 건을 넘어버렸다. 이 때, 뉴어크Newark에서는 주 방위군과 무장한 흑인들 가운데 한차례 총격전이 있었고 디트로이트에서는 43명이 사망했다. 1968년 4월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한 뒤에는 백 여 개 도시에서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사망자가 나왔다. 미국은 월남전, 6월의 인기있는 민주당 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도시 폭동 등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킹 목사가 흑백의 인종 통합이라는 주제를 넘어 월남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하더라도, 소위 그의 “자유주의적” 추종자들의 소외는 문제가 되었으며 그것은 그 시대 대부분의 흑인들에게는 분명했다. 킹 목사 사후, 흑인 지도자의 공백은 H. 랩 브라운, 엘드리지 클리버 그리고 앤젤라 데이비스와 같이 스스로 혁명가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저녁 뉴스들로 채워졌다. 킹 목사의 화해적인 수사는 이제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대격변이 미국을 휩쓸었고 전 세계가 이제 깨닫게 되었다. 1968년 10월, 흑인 선수들이 멕시코 시티에서 열리기로 되어있던 올림픽 경기에 보이콧하기로 결의했다. 흑인 선수들의 보이콧은 혼란스러운 결과들을 낳았는데, 흑인들을 착취하던 미국 정치의 본모습은 200미터 달리기에서 토미 스미스Tommie Smith와 존 칼로스John Carlos가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을 때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시상대에서 장갑 낀 손은 높이 쳐들었던 것(역자 주 - “블랙 파워”를 의미한다)이다. 그들은 그 다음날 대표팀에서 축출되었다. 헤비급 권투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역자 주 - 본명은 캐시어스 클레이)는 조용한 흑인 권투선수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나는 최고다, 나는 멋지다, 나는 나아쁜baad 놈이다.”라고 거리낌없이 포효하면서 이슬람 이름을 취함으로써 전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으며 월남전 참전을 거절함으로써 미국 정부에 맞섰다. 그의 대중을 상대로 떠벌리는 재주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이 순종적인 인종으로서는 혁명적이었으며, 그가 전쟁을 반대하며 했던,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어느 베트콩도 나를 깜둥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말은 그가 맞서던 체제에 대한 조롱이 되었다.

1969년이 되자, 흑인 급진주의 운동은 모든 미국인들이 남북 전쟁의 그날 이후로 미국의 흑인과 백인의 정신성에 내재한 신화적인 대립과 흑인들의 조직적 봉기가 지닌 잠재력을 깨닫게 되었을 만큼 발전했다. 곧 흑인들은 자신들의 본심을 흰둥이Whitey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슬라이 앤드 더 패밀리 스톤의 고전인 1969년에 발표된 연주곡 "Don't Call Me Nigger, Whitey."에 잘 나타나 있다.)

도시에서 자라온 음악인들은 세월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훗날 훵크의 성장에서 일익을 담당한 음악인들 중 대부분은 흑표범당의 전위들과 같이 가난하고 흑인이고 젊었고 남성이었다. 오하이오 플레이어즈의 베이시스트이자 말콤 엑스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였던 마샬 존즈Marshall Jones는 밴드와 함께 켄터키 주 렉싱턴을 지나다가 소요를 보고는 버스에서 뛰어내려 군중들과 뒤엉켰던 일을 기억한다. “그 다음은 있잖아요? 내가 무리 속에 갇혀 있더라고요. 그래서 돌을 던졌죠. 손에 잡히는 어떤 것이든지요.” 붓시 콜린즈도 같은 기억이 있다. “그냥 모두 사생결단으로 덤볐죠.” 그는 신시내티에 있는 그의 집 “바로 근처”에서 벌어진 폭동을 묘사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볼티모어에서는 러버 밴드(붓시 콜린즈의 밴드)의 보컬인 게리 “머드본” 쿠퍼Gary "Mudbone" Cooper가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저도 한 몫 했죠. 거기 끼어들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폭동을 일으켰죠.... 쉽게 공감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뛰어들었고. 왜냐하면 제가 거리 출신이라서... 당신도 거리 출신이라면요. 모든 게 다 도박이거든요.” 그리고 조지 클린턴과 팔리아먼트의 고향인 뉴저지 주 플레인필드에서는 주 방위군이 흑인 청년들을 덮쳐서 총격전을 벌였다. 플레인필드 시의 상업 지구는 타올랐지만 클린턴의 집인 이발소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일련의 이러한 사건들에서 중요한 것은 흑인 젊은이들의 거친 감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세계에서의 대항적인 관점이었다. 그것은 거리의 대학이었으며 그들은 거리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아주 헤비한 훵크의 음침하고 어두운 영혼이 -도시의 드라마가 같은 내용으로 상연되고 재연되고 있기에 - 1990년대 하드 코어 랩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09/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