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 3-4 - 지미 헨드릭스 Pt. 2
지미가 1969년 8월에 우드스톡에서 연주했을 때는 그를 포함하여 6명의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진 밴드 멤버들과 함께였다. 그 밴드는 그의 오래된 군대시절 전우인 빌리 콕스가 베이스, 두명의 아프리카계 중남미인 퍼커셔니스트들 (제리 벨레즈Jerry Velez와 주마 술탄Juma Sultan), 흑인 리듬 기타리스트 래리 리Larry Lee, 그리고 그의 첫 밴드인 디 익스피리언스의 드러머 미치 미첼Mitch Mitcgell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의 연주는 록 음악의 10년을 결산하는 3일에 걸친 이 궁극적인 록 이벤트의 피날레로 진정 탁월한 아프리카의 폴리리듬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이 예전의 익스피리언스의 사운드와 지미와 미치 미첼의 사운드만 남겨두고, 효과적으로 퍼커셔니스트와 다른 기타리스트들의 작업을 뒤섞어버렸다.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지미의 아프리카적인 앙상블은 믹싱 보드위에서 휩쓸려서 사라져 버렸다. 전기 작가 데이브 헨더슨Dave Henderson이 썼듯이, “아프리카적인 드럼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사라지면서 모든 어쿠스틱적인 영역들이 대기 중으로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사례들은 역사적으로 눈에 띄는 곳에서 일어난다. 킹 목사가 죽은 뒤 제임스 브라운이 고립되었듯이 말이다. 가장 잘 팔리는 우드스톡의 실황음반 중에서 가장 잘 팔린 것은 오로지 지미의 “Purple Haze”와 “The Star Spangled Banner"의 솔로 연주였는데, 이것의 미묘함과 아이러니 그리고 지적인 면은 흑인 라디오에서 헨드릭스를 들어보지 못했던 전형적인 흑인 청취자들을 끌어당기는 데 실패했다. 반면에 당시 콘서트의 정점을 이루었던, 당시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산타나의 라틴 록과 슬라이 스톤의 성공적인 개가인 "Higher"는 전설로 남아있다. 음악적으로 동일한 방향을 추구하려던 지미의 노력은 아쉽게도 실종되고 말았다.
우드스톡이 끝나자, 헨드릭스는 1970년 9월 18일 사망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흑인 뮤지션들과 연주했다. 베테랑 R&B 드러머 버디 마일즈Buddy Miles, 헨드릭스 그리고 콕스로 이루어진 ‘더 밴드 오브 집시즈The Band of Gypsys’는 1969년 섣달 그믐날에 필모어 이스트에서 대중에 알려진 유일한 음반을 녹음했다. 지미는 또한 래스트 포이츠the Last Poets (역자 주 - 힙합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할렘의 랩/토스트 집단)의 알라파이어 푸딤Alifia Pudim (별칭은 라이트닌 로드Lightnin' Rod)과 같이, 어느 교도소 수감자들이 쓴 “Doriella Du Fontaine"이라는 랩 곡을 녹음했다. 1969년에는 그가 오래전 뛰어놀던 곳의 심장부에서 열린 할렘 아트 페스티벌에 참가해서 연주했을 때, 흑표범당의 기금모금을 위한 콘서트에 참가해 줄 것을 제안받기도 했지만 그의 소속사가 거절한 적도 있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세금 청구서를 피하기 위해 지미의 밴드는 내키지 않은 유럽 투어를 하고 있었는데, 빌리 콕스가 페마른 섬 페스티벌 (역자 주 - 원서에는 'Isle of Feherman이라고 되어 있는데, Isle of Fehmarn의 오기, 발트 해에 위치한 조그만 섬으로 지미 헨드릭스의 라이브 연주로 유명해졌다.)이후에 “나쁜 약bad acid"를 복용해서 긴장 증세에 빠지게 되었다. 지미는 빌리의 건강 때문에 미국 귀국을 연기하게 되었다. 2주 후, 지미는 런던에서 에릭 버든Eric Burdon, 워War와 함께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무대였다. 다음날 밤, 그는 수면제와 토사물이 범벅이 된 채로 질식하여 사망했다.
그가 알고 있던 모든 뮤지션들이 장례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의 남은 이미지는 이런 것이었다. “그는 록 스타였다. 그리고 그렇게 가버렸다.” 시간의 경과 또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일즈 데이비스, 프린스, 붓시 콜린즈, 조지 클린턴, 노먼 위트필드Norman Whitfield, 어니 아이즐리Ernie Isley, 에디 헤이즐Eddie Hazel, 스티비 원더 그리고 마빈 게이와 같은 다른 아티스트들에게서 나타나는 그와의 주요한 음악적 연계는 음악 산업에 의해 실종되었다. 지미는 생존했던 그 어느 아티스트들만큼이나 흑인 음악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역사는 훵크(흑인적이라고 읽으라.)의 관점이 아닌, 록(백인적이라고 읽으라.)의 관점에서 쓴 것이다. ‘흑인’ 뮤지션으로서의 지미 헨드릭스에 관한 진정한 이야기는 희미해졌으며 이집트 문명의 흑인적 뿌리(역자 주 - 리키 빈센트와 같은 블랙 파워 운동가들은 이집트 문명이 흑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는다.)와 같은 가짜 신화에 의해 왜곡되었다.
지미는 록 음악의 만신전pantheon에서 너무나 빨리 사라져 버렸고, 흑인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그가 대중 앞에 많이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그다지 화제가 되지 못했다. 록 음악의 근시안적인 신화학 중 하나는 흑인 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아티스트들, 예를 들어 헨드릭스, 롤링 스톤즈,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즈를 그 사운드의 혁신자이자 창조자로 전할 뿐, 그들의 흑인 조언자는 모호하게 처리해버린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지미에게는 그들의 흑인 형제 자매the bruthas and sistas들을 사로잡을 수많은 기회가 있었다. 슬라이 스톤 또한 록을 연주했지만 그 당시에는 흑인들로부터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확실히 (장발의 히피들로 가득찬 흐느적거리고 약에 취한 록 클럽과 같은) 지미의 연주 성향과 모조리 백인으로 채운 그의 밴드가 (흑인들 사이에서 슬라이보다 인기가 없었던) 이유가 될 것이고 아마도 그러한 이유는 더 있을 것이다. 넬슨 조지는 그 이유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지미 헨드릭스는 블루스와 R&B를 그의 건축물의 블록으로 사용했고 슬라이 스톤은 가스펠과 소울의 영향 하에서 작업했다.... 이 둘 간의 차이점은 헨드릭스가 흑인들이 이미 용도 폐기했던 것으로부터 하나의 스타일을 이끌어냈다면, 슬라이는 약삭빠르게 흑인 대중들보다 몇 걸음 앞서 가 있었다는 것이다. 슬라이는 헨드릭스처럼 싸구려 클럽에서 일하지 않았다. 대신에 슬라이는 항상 훵크를 채워주었다. 슬라이는 (제임스) 브라운의 훵크를 록 청중들에게 거의 가공되지 않은 채로 제공했을 뿐이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자서전에서 그의 좋은 친구였던 지미 헨드릭스에 대한 오해를 설명할 때 보다 더 직설적인 태도를 취했다.
헨드릭스는 항상 영국 백인 친구들과 있을 때는 항상 6/8 비트로 연주했고 그래서 나는 그의 음악이 힐빌리(역자 주 - 컨트리 음악의 원형이 되는 미국 남부의 백인 음악)같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버디 (마일즈)나 빌리 (콕스)같은 밴드 오브 집시즈 멤버들과 연주할 때는 그가 내내 무엇을 해왔던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레코드 회사와 백인들은 그의 밴드에 백인이 있을 때 그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은 나처럼 블루스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서로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위대한 블루스 기타리스트였다. 그와 슬라이는 둘 다 위대한 천부의 재능을 지닌 뮤지션이었다. 그들은 들었던 것을 연주했다.
(201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