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 3-31 - 재즈는 어디로?
재즈는 어디로?
1980년대에 이르자, 재즈는 일관된 음악적 경향을 정의하는 데는 쓸모없는 용어가 되어 있었다. 분명하게 대중적인 호소력을 가진 음악들 - 앤젤라 보필Angela Bofill, 히로시마Hiroshima, 조지 하워드George Howard 등과 같은 음악 -은 이 용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으며, 크로스오버 재즈 아티스트들, 특히 조지 벤슨,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허비 행콕 그리고 마일즈 데이비스는 그들이 생각하는 현대적인 재즈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으면서도, 1980년대 내내 재즈의 뿌리로 되돌아갔던 적은 단 한번 혹은 그마저도 없었다.
80년대의 가장 성공적인 밴드였던 웨더 리포트는 한 음악적 시대가 끝나감에 대한 눈물 젖은 비가(悲歌)이자, 탁월한 멜로디를 가진 "Can It Be Done?"이 수록되어 있는 1984년 앨범 Domino Theory을 통해서 운명에 대한 심오한 감수성에 빠져들게 되었다. 키보디스트 조 자비눌과 베이시스트 자코 패스토리우스가 이끌었던 웨더 리포트는 재즈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을 새로이 정의하는 데 십 년을 바쳤다. 하지만 80년대가 지지부진하게 지나감에 따라, 많은 다양한 형태의 재즈를 잉태했던 활발한 음악적 상호작용은 점차 쇠퇴하고 말았다. 다양한 스타일, 즉 “레어 그루브rare groove"로 불리는 훵크 연주곡에서부터 조야한 재즈 록 퓨전, 달콤한 “콰이어트 스톰Quiet Storm”(역자 주 - 스모키 로빈슨의 1976년 동명 앨범에서 파생된 용어로 70년대의 슬로우 잼), 파라오 샌더스Pharaoh Sanders나 선 라와 같이, 불협화음이 가미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완고한 아티스트들. 그리고 윈튼 마살리스Wynton Marsalis나 노익장의 디지 길레스피와 같은 어쿠스틱 전통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들의 음악을 재즈라고 불렀으며, 재즈라는 개념은 핵심이 결여된 채로 남겨져 있었다.
팝계의 슈퍼스타 프린스Prince가 1983년 “재즈의 사망시기가 왔다.”고 넌지시 공표했을 때, 그는 음악 공동체 내에서의 동요를 폭넓게 짚어냈던 것이다. 프린스가 비밥을 참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재즈 즉, 저항 그리고 음악적인 섬세함을 가진 극적인 표현의 매개체로서 창조되었던 것들이 이제 대부분 그 본질적인 목적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지는 듯 보였다. 1987년 힙합 활동가인 해리 앨런Harry Allen(역자 주 - 유명한 재즈 색소포니스트와는 동명이인)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재즈의 재탄생을 반가워했던 반면, 최근 소위 재즈라는 것은 죽음을 맞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니면 아마도 사회 기능적 측면에서 몽유병자처럼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이 예술 형태, 즉 자신이 겨냥했던 이전의 목표물에 의해서 성역화 되고 숭배 받았던 예술 형태는 오늘날 자기 결정권을 가진 흑인들의 감수성을 표현하는 형식이 될 수는 없다. 현상 유지status quo에 쉽게 봉사하는 정치성을 가진 이 음악은 문자 그대로이든, 상징적으로든 흑인의 진보적인 사고를 수용할 수 없다.
재즈를 미국의 “고전” 음악으로 표현하려던 윈튼 마살리스의 널리 잘 알려진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한 “스탠더드 풍의” 재즈 형태에서 벗어나는 재즈 뮤지션들을 (윈튼의 형 브랜포드Branford를 포함하여) 폄훼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역자 주 - 윈튼 마살리스가 정통 재즈를 복원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형 브랜포드는 정통 재즈에서 일탈하여 애시드 재즈 밴드 “벅샷 르퐁크Buckshot LeFonque를 이끌고 있다.), 재즈는 1980년대에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재즈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진실로 어디에도 그 방법은 없다. 재즈의 기능은 누군가에게는 오로지 하나만의 의미를 띄도록,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른 의미를 띄도록 하면서 수년간 변화를 거듭해왔다. 비밥계의 거인인 디지 길레스피는 자서전에서 재즈를 단순하게 정의했다. “재즈는 사람들을 춤추게 하려고 만든 음악이다. 그래서 재즈를 연주할 때, 사람들이 춤을 추려고 하지 않거나 발장단을 맞추지 않는다면, 그 음악은 재즈의 이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우리 음악을 들어보면 춤을 추고 싶어질 텐데 바로 우리의 음악이 리듬을 느끼게끔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음악적 거인들, 특히 요즘 세대와 더욱 근접한 이들은 고전적인 재즈 사운드의 교훈을 보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재즈의 뿌리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일렉트로닉 재즈나 댄스 음악을 확고한 어조로 비난했다. “우리 세대의 뮤지션들은......” 하고 윈튼 마살리스는 1991년 <골드마인Goldmine>지(紙)의 지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라면서 블루스나 그 어떤 비슷한 것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훵크와 팝 음악을 연주했지요. 이것과 재즈를 연주한다는 것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간격이죠. 그리고 재즈를 연주하려면 재즈 연구에 대한 아주 의식적인 욕망과 스윙을 배우기 위한 꾸준한 연습이 수반됩니다.” 고전적 재즈에 대한 마살리스의 헌신은 존경스러우나, 기술적 측면이 아닌, 태도Attitude의 측면에서 재즈를 논의하는 사람들도 있다. 랩 그룹 퍼블릭 에너미에서 “미디어 어새신Media Assassi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해리 앨런은 ”힙합은 새로운 재즈“라는 관점을 고수한다.
이치에 닿는다면, 훵크가 설명에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가진 것 없는 흑인들의 견지에서, 앨런은 지난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확장되었던 자기 결정권을 가진 흑인들의 감성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훵크의 시대가 그 유일한 “잃어버린 고리”다. 밥 재즈는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말콤 엑스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적인 면에서 흑인 민족 운동의 중심이었다. 1980년대 힙합 문화가 성장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1970년대까지 자기 결정권을 지닌 흑인들의 감성을 고취하는 것은 훵크- 원래는 소울 뮤직이라고 불렀던 것 -였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이 사실을 이해했으며, 이에 따라 자신의 음악을 변화시켰다. 그가 “전통적인” 재즈로부터 벗어난 것은 훵크로 향하기 위함이었으며 흑인 민중들로 향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마지막 녹음은 엄밀히 말해 힙합이었으며, 확실히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허비 행콕도 더 탁월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도 마일즈와 동일한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좀 더 주의 깊게 음악을 들어본다면, 제임스 브라운의 밴드에 속한 뮤지션들이 도회적이면서도 거친 형태로 재즈를 연주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훵크다.
(201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