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Funk> 4-2 - 전미TV, 라디오 아나운서 협회

Baron Samdi 2016. 6. 25. 10:27

내트라(NATRA : 전미 TV, 라디오 아나운서 협회)

흑인 아티스트들에 대한 메이저 레코드 회사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마치 “공정 경기 위원회Fair Play Committee”와 같은 역할을 하는 ‘전미 TV 라디오 아나운서 협회’ 혹은 ‘내트라’로 알려져 있는 흑인 라디오 디제이들과 음반 제작자들의 연합체의 강력한 전술 덕택이었다. 내트라는 1956년부터 지속되어 온 흑인 라디오 디제이들의 공개 토론회로 소집되어, 최신 동향을 논의하고 레코드 회사 중역들과 수다를 떨고 인맥을 다지는 단체였다. 매년 모일 때마다 흑인 디제이들의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그들의 정치적인 수사들은 더욱 과격해졌다.

 

1960년대 중반, 흑인 디제이들은 흑인 민권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집회 행진을 진행하고 중계했으며, 그들이 소울 음악의 정수들을 방송에 내보냈던 것처럼 중요한 소식들을 전달했다. 그들의 엄청난 영향력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사망하던 날 밤, 많은 지방 디제이들이 ‘연방 통신 위원회(FCC)’의 규제를 거부하고 밤늦도록 방송을 하면서 청취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자제를 당부하면서 현실화되었다. 코미디언 딕 그레고리Dick Gregory는 내트라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마이크는 펜이나 칼보다도 더 강합니다. 마이크 하나면 나보다 내 일곱 아이들을 더 잘 통제할 수 있죠. 하지만 명심하세요! 그 바보 같은 선전이 다 끝나고 나면, 이제는 정보를 주어야 합니다.” 1960년대 후반에 열린 내트라 총회에서는 디제이들이 그들이 만들어낸 흑인 음악에 대한 백인의 통제 즉,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고 개선되지 않는 통제에 대해 거부를 표명할 만큼 대담해졌지만, 그들에게 무기라고는 말 뿐이었으므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죽음이 있은 지 몇 달 뒤인, 1968년 여름 마이애미에서 열린 13번째 총회에서는 (킹 목사 미망인인 코레타 스캇 킹 Coretta Scott King, 빌 코스비Bill Cosby와 같은 저명인사와 메이저 레코드 회사의 중역들 대부분이 참석했다.) 내트라의 멤버들이 몸담고 있지만, 소유는 백인들이 하고 있는 음반 산업에 대해 보다 더 급진적인 태도를 취했다. “우리는 음반 회사에 아무 것도 구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사업을 계속하고 싶다면 우리를 그들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내트라의 사무총장 델 쉴즈Del Shields는 공격적인 수사를 구사했던 연설 중의 하나에서 이와 같이 강조했다. 그러나 연단 뒤에서, 그리고 회의장 주변에서는 더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체제”에 대한 모호한 위협은 이 시기에 이르자 레코드 사의 중역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확산되었다. 피터 거랄닉Peter Guralnick의 책 <달콤한 소울 음악Sweet Soul Music>에 따르면, 유명한 업계의 원로이자 애틀랜틱 레코드 사의 프로듀서인 제리 웩슬러(역자 주 - 제리 웩슬러는 ‘백인’이었다.)의 초상이 불태워졌고, 들리는 바에 따르면 주먹다짐과 권총을 휘두르고, 끌려 나가고, 협박당하고, 두드려 맞는 사례들도 있었다고 한다. 애틀랜타 출신의 베테랑 디제이 잭 “잭 더 래퍼” 깁슨Jack "Jack the Rapper" Gibson은 이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럼요, 그런 일들이 벌어질 때 거기에 있었죠.” 거랄닉은 아이작 헤이스의 회상에서 그 사건에 대해 인용하고 있다. “내트라 사람들이 중역들을 납치해서 보트로 끌고 나갔을 때, 거기 있었죠. 내트라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어요. ‘야, 너희들이 우리를 벗겨먹었으니까, 이제는 돈을 좀 돌려줘야겠어!”... 아마도 그 이후로는 레코드 회사들이 흑인 아티스트들에게 좀 더 고분고분해졌죠.”

 

레코드 회사들은 이제 흑인 밴드들은 다루는 데 있어 보다 사려 깊은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내트라와 흑인이 중심이 된 사회조직들(그리고 아티스트들)에 대한 지원은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파티에 참석하고 민감한 인종 문제들을 회피하기 위해) 새로이 많은 흑인 음반 제작자들과 중개업자들을 고용했으며 평소와 같이 사업을 계속했다.

 

업계에서의 인종차별은 없어졌지만 실제적인 권력구조는 바뀐 것이 없었다. “우리가 성공하면, 그들은 아마 흑인 라디오 방송계를 통째로 바꿀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죠. 백인들이 레코드 회사와 라디오 채널을 다 가지고 있거든요.” 깁슨은 이렇게 말했다. (흑인들의 민족적 열광이 정점에 다다른 1960년대 후반에도 전국 300개 이상의 R&B 라디오 채널 중의 오직 8개만이 흑인 소유였으며, 이 8개 중의 3개가 제임스 브라운의 소유였다.)

 

아이러니로 점철된 상황이었다. 메이저 레코드 회사는 흑인 음악이 툭 건드리면 쏟아지는 금광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이것이 음악 안에서 인종적인 자각과 새로운 성숙의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트라 총회와 흑인 아티스트들에 대한 메이저 레코드 사의 관심을 끌기위한 다른 행사들에서 불거져 나온 “블랙 파워”의 저항적인 태도는 사운드 면에서 메이저 레코드사의 관심을 받는 아티스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진정한 창의성과 자립성을 더욱 어렵게 만들던, 소울과 록 간의 더욱 엄격한 인종적 구별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70년대 초반이 탁월하고 효과적인 흑인 저항 음악에게는 획기적인 전기였던 반면, 많은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들은 인종 차별기의 R&B 가수들이 견뎌내야 했던 것과 동일한 협잡, 그러니까 가짜 계약, 적은 레코드 인세, 그리고 저작권의 실종 등을 감내해야 했다.

 

(201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