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르로이 버지스 인터뷰 -2

Baron Samdi 2016. 6. 25. 10:49

스튜어트 씨나 러셀 씨하고는 의논한 겁니까?

 

먼저 우리 부모님과 상의했어요. 아무래도 제 후원자시니까요. 그리고 그 다음에 스튜어트와 러셀을 찾아갔어요. 처음에는 안 믿더라고요. 제가 진심임을 알게 되니까, 부다에 남자고 설득하려고 하더군요. 하지만 떠나고자 하는 제 의지가 굳건했습니다. 그 친구들과 함께 해서는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어요.

 

밴드를 떠나서는 별다른 계획이 있었습니까?

 

1977년에 밴드를 떠나고 나서 일 년 남짓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곡을 쓰기 시작했고 블랙 아이보리에서 벗어나서 제 첫 번째 히트곡을 쓸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다시 패트릭 애덤스와 함께 하게 되면서부터죠. 패트릭은 뮤지크 Musique 같은 그룹들과 디스코 신에서 많은 작업을 하기 시작했어요. 또 애틀랜틱 레코드에서 프릭 Phreek이라는 프로젝트도 하고 있었죠. 패트릭은 원래 그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상태였지만 앨범 상에 몇 곡이 빈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Weekend”라는 곡을 만들었고 패트릭은 (프릭에) 그 곡을 쓰고 싶다고 하더군요. 애틀랜틱 측에서도 곡을 들어보더니 이럽디다. “이 싱글 대단하군!”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이 곡이 그 앨범에서 유일한 싱글 커트 곡이었습니다.

 

그래서 “Weekend”가 선생님의 작곡 경력에서 도약대가 된 셈이로군요.

 

딱 맞추셨습니다. 저는 알림 Aleen 형제들과 작업을 시작했고 몇몇 군소 레이블에서 곡들을 발표했는데, 라디오 쪽에서 성적이 좋았습니다. 그때쯤, 블랙 아이보리도 부다 레코드에서 3집 작업을 시작한 터라 곡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Mainline”이라는 곡을 써두었는데 그 곡을 묵혀두고 있었어요. 애초부터 제가 쓰려고 작곡한 곡이라 데모 상태로 놔둔 곡이었거든요. 진짜로 괜찮은 곡인데 아무도 그 곡의 매력을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그 친구들을 다시 찾아가서 블랙 아이보리의 곡으로 작업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패트릭 애덤스와 블랙 아이보리의 오리지널 멤버가 다시 뭉치게 된 거죠. 저는 블랙 아이보리의 멤버로 다시 돌아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지만 그 싱글 작업에서만큼은 곡도 써주고 백 보컬도 넣고 키보드도 쳤습니다. 패트릭은 현악과 관악 편곡을 손봐주었고요. 그러고 보니 옛 시절로 돌아간 것 같더군요. “Mainline”은 블랙 아이보리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고 우리의 명성을 가장 널리 알린 곡이 되었어요. 그 싱글이 실린 앨범 <Hangin’ Heavy>는 블랙 아이보리의 마지막 앨범이 되었습니다. (역자 주 근래에 <Continuum>이라는 앨범이 나왔다.) 스튜어트와 러셀이 “Then and Now”라고 다른 앨범을 내긴 했습니다만, 오래된 곡에 새 곡을 조금 얹은 일종의 컴필레이션 음반이었을 뿐이죠. 어쨌든 저는 계속 곡을 썼고 제가 쓴 곡들 덕에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었어요. 작곡을 계속 하게 되면서 노래도 부르게 되었고 그 노래를 사람들이 들어줬어요. 이 때부터 제가 작곡가 겸 프로듀서로서 자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 밴드들을 키워냈어요. 알림, 컨버션 Convertion, 로그 Logg, 유니버설 로봇 밴드 Universal Robot Band, 체인지 Change, 폰다 레이 Fonda Rae, 조슬린 브라운 Jocelyn Brown을 비롯해서 다른 여러 밴드들을요.

 

블랙 아이보리에 관한 몇몇 컴필레이션 음반이 CD화되었습니다. 이 중에 “You And I”는 오리지널 버전이 아니라 대개 80년대 초기 느낌을 주는 신스 & 드럼 머신 버전으로 들어가 있는데요.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저도 그 곡에는 몇 가지 다른 믹스 버전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오리지널 앨범 컷은 현악을 곁들이 7분 길이의 곡이죠. 하지만 근 몇 년간의 다양한 컴필레이션 음반들에서는 믹스된 버전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손을 대서 뽑아낸 어설픈 것들 말예요. 퍼셉션 레코드가 팔려나갈 때 블랙 아이보리의 매니저였던 레니 애덤스 Lenny Adams가 그 곡의 판권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 친구가 결국 슈거힐 레코드에 팔아넘겼더군요. 소유권이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옮겨 다녔는데 무슨 손을 쓸 수 있겠어요.

 

로그 Logg라는 프로젝트가 성장하게 된 데에는 흥미로운 얘기가 있더군요. 어떻게 몇 종의 다른 레코드사에 발을 걸치면서 또 어떻게 각기 다른 세 개의 이름을 가지게 될 수 있었나요?

 

제임스 캘러웨이 James Calloway와 제 사촌인 소니 데이븐포트 Sonny Davenport, 이 두 사람은 제 작곡 파트너이자 프로듀싱 파트너였어요. 언젠가 그레그 카마이클 Greg Carmichael이 샘 SAM 레코드를 위해 곡을 써보라고 제안해왔어요. 우리는 컨버션이라는 이름을 떠올리고는 “Let’s Do It”이라는 곡을 썼어요. 이 곡은 클럽에서 크게 히트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샘 레코드에 앨범을 내보자고 제안했는데, 샘 레코드 사람들은 온전한 앨범 한 장을 만들 돈이 충분하지 않다면서 곡을 말도 못하게 싼 값으로 후려치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싫어요! 앨범을 내려면 진짜로 견적을 내오시죠!” (웃음) 하지만 우리가 어리바리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자리를 뜬 다음에 컨버션이라는 이름으로 저작권 등록을 해버렸더라고요. 샘 레코드는 그러면 우리가 생각을 달리 할 줄 알았나 봅니다. 하지만 그레그는 우리 프로젝트를 샐소울 Salsoul 레코드의 케이어 Cayre 형제에게 가져갔어요. 그 사람들은 컨버션 앨범에 홀딱 빠져있었지만 우리가 보기에도 그 이름은 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레그가 제게 전화로 그룹 이름을 뭐로 할 거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저는 앨범에 넣을 곡을 쓰느라 바쁘니, 샐소울 사람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누가 또 전화를 해와서 로그 Logg라는 이름이 어떠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그 이름이 어떻게 지어진 건지 몰라요. 제가 그 이름 뜻이 뭐냐고 물었어요. 아무 뜻도 아니라네요. (웃음) 앨범은 미국 내에서도 그럭저럭 잘 팔리나 싶더니 유럽에서는 엄청나게 히트를 쳤습니다. 당시는 제임스, 소니 그리고 저 이렇게 팀을 이루어 아귀가 잘 맞는 기계처럼 작업을 해나갔어요.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었고요. 그 생각을 마음속에 잘 담아두기만 하면 되었어요. 그리고 우리를 잘 뒷받침해줄 수 있는 좋은 조력자들이 있었고요. 그래서 로그가 제가 만든 최고의 앨범들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겁니다.

 

“Barely Breaking Even”은 로그의 앨범에 넣으려고 녹음이 된 곡인데요. 어째서 일 년 넘게 묵힌 뒤에 다른 레코드사에서 애덤스와 카마이클의 프로젝트인 유니버설 로봇 밴드로 발매가 된 겁니까?

 

“Barely Breaking Even”은 로그 프로젝트에서 훔쳐온 겁니다. 그 곡의 마스터 녹음이 앨범의 나머지 곡들과 함께 스튜디오에 있었는데, 그레그 카마이클이 들어오더니 그 테이프를 집어 들더라고요. 그 형은 샐소울하고 영 불편한 관계였는데 이런 식이었죠. “그래 그 놈들이 이렇게 좋은 곡들을 다 갖다 쓰지도 않을 거라고. 그럼 내가 하나 가져가야겠어!” 그래서 곡이 나오면 앞으로 이 곡을 낼 사람에게 저작권을 주려고 한 겁니다. 그래서 그 곡은 우리가 가장 재미있게 녹음한 곡이 되었습니다. 그걸 보고 우리는 뭐랄까 미쳐버렸던 거죠. 그때 모든 스태프들, 친구들도 그 자리에 다 있었어요. 정말로 그날 다 있었어요. 우리가 곡을 하나 녹음하려면 하루밖에 시간이 없었어요. 마침내 공이 우리에게 넘어 온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녹음을 하는데 아무도 지친 기색이 없었습니다. 14시간인가 16시간인가를 내리 녹음을 했는데도요.

 

확실히 녹음 당시의 열기가 느껴지네요. BBE 레코드의 피터 아다콰 Peter Adarkwah는 바로 그 곡에서 자기 회사 이름을 따왔다고 했지요. (역자 주 BBEBarely Breaking Even의 약자.)

 

(웃음) 그 친구가 말해주더군요. 그 친구를 런던에서 한 번 봤는데요. 그동안 제가 쓴 곡을 선곡해가지고 투어를 다닐 때였죠. 그 친구 말로는 자기 회사 이름은 유니버설 로봇 밴드로 활동하던 시절의 제 곡에서 따왔다고 하네요.

 

선생님과 소니 씨, 그리고 제임스 씨가 만들어낸 히트곡들 전부가 일종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부기 boogie’라고 부르더군요. 그러다 보니 으레 (by default) 선생님은 킹 오브 부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기가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웃음) 사람들이 저를 킹 오브 부기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부기는 그저 디스코일 뿐입니다. 속도만 좀 더 느릴 뿐이죠. “Let’s Do It”은 부기 타입의 곡이죠. “Over Like a Fat Rat”도 마찬가지고, 또 중요한 곡인 “I Know You Will”은 누가 봐도 부기입니다. 디스코만큼 빠르지는 않지요. 소니와 제임스는 제 작곡, 프로듀싱 파트너일 뿐 아니라 우리는 함께 쓴 모든 곡들에서 중심적인 리듬 섹션을 설계했습니다. 저는 키보드를 맡았고, 소니는 드럼을, 제임스는 베이스를 맡았어요. 이게 부기의 구체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낸 중심축이 된 겁니다. 우리는 상업적으로 음악을 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항상 그 안을 뭔가 오묘한 것들로 채워 나갔습니다. 그 좋은 예가 “snug as a bug / in your arms.”라는 가사에 따라붙는 “Over Like a Fat Rat”의 피아노 파트인데요. 이게 아마도 청중 분들이 주류 대중음악에서는 쉽게 들어볼 수 없는 그런 깊은 맛이 나는 코드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음악에 녹여 넣으려고 했던 거고요. 하지만 이게 다 뮤지션다운 태도에서 나온 것이겠죠.

 

폰다 레이가 부른 “Over Like a Fat Rat”은 선생님 곡 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곡이고 여전히 수많은 클럽 음악과 방송 음악에서 차용된 곡일 겁니다. 이 곡은 어떻게 만들어내시게 된 겁니까?

 

엔지니어 중에 밥 블랭크 Bob Blank라고 우리 세 사람의 아주 친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작지만 좋은 스튜디오를 하나 갖고 있었어요. ‘블랭크 테이프스’ (역자 주 밥 블랭크의 성을 따서 블랭크의 테이프들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고, 곧 녹음을 시작할 공 테이프라는 뜻도 있다.)라고 프릭, 허비 맨, E 킹의 앨범을 여기서 작업했는데요. 어느 날, 그 친구가 우리를 찾아오더니 자기네 스튜디오로 와서 자기가 작업해놓은 곡을 듣고서 손을 좀 봐달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스튜디오로 가서 3개의 데모를 찍어냈어요. 그 중 하나가 “Over Like a Fat Rat”인데 어쩐 일인지 밥이 폰다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나서 다시 제게 전화로 폰다에게 보컬을 맡겨도 괜찮겠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싫어.” 그랬죠. (웃음) 하지만 제가 스튜디오로 가서 폰다를 만난 뒤에 보컬을 맡겼습니다.

 

80년대 후반에 독립 레이블에서 알림의 앨범과 싱글을 낸 뒤에 잠정적으로 휴식기에 들어갔습니다. 무엇 때문에 90년대 동안에 음악계를 떠나 계셨던 겁니까?

 

글쎄요. 저는 1992년쯤까지도 음악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어요. 당시는 시장이 변화를 맞던 시기였어요. 힙합이 점점 유행하기 시작했죠. 모두가, 그 중에서 특히 저 번화가에서 일하는 음악계 사람들도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던 어두운 시기였죠. 그래서 음악에서 손을 떼고 시간을 갖자, 음악을 더 공부하고 이제껏 해온 일들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자고 했던 겁니다. 1999년쯤에 제 친구 중에 로이 파램 Roy Parham이 다시 음악계 일을 시작하도록 등을 떠밀었어요. 그게 임시로 “Timeless”라고 부르던 시카고 하우스 음악 프로젝트로 출발한 건데 글렌 언더그라운드 Glenn Underground, 모리스 조슈아 Maurice Joshua, -스무브 E- Smoove 같은 프로듀서들이 속한 프로덕션이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건 곧 나올 겁니다. 또 다른 프로젝트로는 스웨덴의 슬리퍼리 피플 Slippery People’이라는 프로젝트가 있고요. 그동안 캐시어스 Cassius와 작업도 했고 영국의 소울 브라더 레코드에서 제 음악으로 2개의 선집을 냈습니다. 브레인스톰 Brainstorm의 리드 보컬인 벨리타 우즈 Belita Woods와 듀엣으로 작업한 곡도 있는데 2003년에 베이스 보이즈 레코드에서 나왔고요. 그러면서 ‘Throwback’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작업해온 프로젝트도 있네요. 원래 이 프로젝트는 1979년에서 1985년 사이에 작업했던 미발표곡 중에서 가려 뽑은 곡들을 모아놓은 겁니다. 우리는 다시 그 당시로 돌아가 음악을 다시 들어보고 곡들을 디지털 방식으로 복각시키고 재작업을 했어요. 마지막으로 블랙 아이보리의 재결합 앨범이 나왔어요. 이제 구입이 가능하실 거예요. 다른 많은 분들을 게스트로 참여하게 했죠. 조지 벤슨이나 스티비 원더 같은 분들 말이죠. 앨범에는 진짜로 스티비 원더의 미발표 곡이 수록되어 있어요.

 

이제껏 모든 프로젝트들에 대해 얘기를 나눠봤지만, 이제야 선생님은 예명을 다 벗어던지고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할 준비가 된 것 같군요.

 

사람들이 제게 자주 묻는 질문이 왜 네 이름을 가지고 한 활동이 적으냐, 그리고 왜 르로이 버지스 앨범은 없느냐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저는 제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음악이 무엇보다도 항상 가장 중요한 것이어야 했어요. 그래서 이름을 알린다거나 하는 일에 정신을 쏟게 되면 점점 음악에는 소홀해지게 되지요. 제가 음악계에 투신한 이유는 사람들이 좋은 기분으로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이 음악 자체로만 두고 볼 때가 제게는 제일 좋은 일입니다. 그래야 제가 음악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거든요. 제 삶이 그렇게 흘러왔고 음악을 연구한다는 일은 제대로 하려면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 끝. 감사합니다.  

 

 

(2015/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