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심’이 없는 편이다. 참을성이 없는 성정 때문인지 음악을 앨범 위주로 듣지 않고 귀에 들어오는 싱글 위주로 듣는다. 특정한 아티스트에 쉽사리 매료되지 않고, 이 아티스트, 저 아티스트를 기웃거리며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한 아티스트의 전곡을 구비하는 일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데오다토, 오하이오 출신의 훵크 밴드 슬레이브와 바로 이 르로이 버지스 Leroy Burgess가 될 것이다. 르로이 버지스는 ‘갓 오브 부기’ 혹은 ‘킹 오브 부기’로 불리며 수많은 DJ들과 언더그라운드 디스코 팬의 숭배를 받아왔다. 얼마 전에는 50명의 DJ들이 뽑은 최고의 아티스트로 뽑히기도 했다. 르로이 버지스 곡의 매력은 청중을 몰아지경으로 몰아가는, 그 중독성 있는 특유의 사운드일 것이며, 또 다른 매력은 불자동차 사이렌을 방불케 하는 독특한 보컬일 것이다. 왕이시여! 부디 내한하여 파티 한 번만 열어주소서! (르로이 버지스가 즐겨 입는) 보라색 미식축구 저지 입고 양손의 경광봉, 입에는 호루라기를 물고 달려가겠나이다!
르로이 버지스 인터뷰
왕위에 오른 “부기의 왕” 르로이 버지스.
르로이 버지스에게 "부기"라는 말을 꺼낸다면 이런 상황극을 보게 될 게 분명하다. 버지스가 가짜 영국 액센트로 "왕관을 다오, 내 왕관"하면서 외치고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유쾌한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버지스는 바깥 외출을 어색해 하며 브롱크스의 고즈넉한 거리에서 산책을 즐기는 사람이다. 버지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사람들 속에 숨어서 돌아다녀 보고 싶어요. 저는 제 자신이 안티 스타라고 생각하거든요.”
훵크 음악을 들어오면서 이 탁월한 아티스트 르로이 버지스의 곡을 듣지 않고 지나가기란 힘든 일이다. 길거리에서부터 경력을 시작한 3인조 소울 밴드 블랙 아이보리의 창립 멤버이자 리드 보컬로 거의 십년이라는 시간 동안을 활약한 뒤에 버지스는 폰다 레이, 로그, 유니버설 로봇 밴드와 같은 인디 음악계에서 댄스 음악으로 서서히 명성을 얻은, 이단의 거장으로 변신했다. 이와 동시에 에디 켄드릭스, 릭 제임스, 허비 맨, T.S. 몽크 (역자 주 – 유명 재즈 뮤지션 셀로니어스 몽크의 아들인 훵크 뮤지션)와 같은 메이저급 레코드사의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하우스 음악의 선조 격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한 뮤지션 중의 하나로 그의 음악 이력이 낳은 성과는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1) 레어 훵크 젬 (2) 콰이어트 스톰 클래식 (3) 패러다이스 거라지(역자 주 명 DJ 래리 르밴이 활약했던 클럽)에서 내세울 만한 곡들 (4) 힙합 샘플링의 소재 (5) 상기한 바의 전부, 이상이다.
2004년 로마의 레드 불 뮤직 아카데미에서는 대중 속에 뒤섞여 있거나 음악계의 유망주들을 가르치는 르로이 버지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의 겸손한 태도는 성공적인 음악경력과도 잘 어울렸다. 그러니 당신도 (음악을 하면서) 살찐 쥐처럼 힘겨워지거나 (over like a fat rat : 역자 주 모두 르로이 버지스가 작곡한 노래 제목.), 간신히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다는 생각 (barely breaking even)이 든다면 그를 탓하지 말지어다. 그의 부기 탓이라면 모르겠지만. (blame it on the boogie)
고등학교 때 밴드인 ‘멜로우 소울즈’가 어떻게 ‘블랙 아이보리’가 되었나요?
블랙 아이보리가 결성되기 전에는 멜로우 소울즈가 진짜 이름이었어요. 1967년 여름이었는데 래리 뉴커크 Larry Newkirk라는 친구와 농구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코트에 서더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래서 저도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자기 밴드에 저를 초대해주었습니다. 결국 래리가 나가고서 스튜어트 배스컴 Stuart Bascombe이 들어왔죠. 또 다른 친구 비토 라미레즈 Vito Ramirez도 나가면서 러셀 패터슨 Russell Patterson이 들어왔어요. 스튜어트, 러셀, 그리고 제가 블랙 아이보리를 맡게 되었죠.
새로운 라인업으로 자리를 잡으셨는데요. 패트릭 애덤스와는 어떻게 알게 되신 거죠?
패트릭은 래리 뉴커크의 누나하고 사귀고 있었어요. 게일이라고. 그 인맥이 있었기 때문에 데이트를 빌미로 패트릭을 불러다놓고 우리 실력을 좀 봐달라고 할 수 있었죠. 하지만 패트릭은 전화로 우리한테 못 오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전화를 받던 중에 제가 그 뒤편에서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패트릭이 제 노래를 듣더니 누가 노래를 부르고 있냐고 묻더래요. 그 덕분에 우리는 전화로 오디션을 볼 수가 있었죠. 그 후에서야 패트릭이 우리 밴드를 데려다 쓰게 되었어요. 각지의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장기 자랑 식으로 공연을 하기 시작했지요. 패트릭은 쿨 앤드 더 갱의 매니저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쿨 앤드 더 갱은 보컬이 없는 순수한 연주 밴드였어요. 그래서 그 매니저가 우리를 무대 위로 올리기로 결정했어요. 밴드가 연주해주는 가운데 차트 탑 40에 오른 노래를 우리가 부르는 식이었죠. 이게 우리에게는 실제적인 첫 번째 무대 경험이 되었습니다. 몇 가지 개인적인 변화를 겪은 뒤에 “Don’t Turn Around”를 녹음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갔습니다.
그게 시그마 사운드 스튜디오였죠?
물론이지요! 패트릭은 그만의 발라드 감성으로 우리 삼촌인 탐 벨 Thom Bell (역자 주 – 갬블 & 허프 듀오와 함께 필리 사운드를 구축한 명 작곡가)과 경쟁 관계에 있었어요. 그 때 당시는 모든 뮤지션들이 그런 델포닉스 스타일의 노래들을 썼거든요. 그래서 패트릭이 우리와 돈을 갹출해서 필라델피아로 간 겁니다. 필라델피아에서 필리 사운드만의 리듬 섹션, 현악 섹션, 그리고 관악 섹션을 녹음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서 “Don’t Turn Around”와 “I Keep Asking You Questions”를 녹음했어요. 뉴욕으로 돌아와서 패트릭은 어르고 달래듯 별짓을 다 하더니 퍼셉션/ 투데이 레코드사와의 계약을 맺게 만들었습니다. 블랙 아이보리 자체로도 힘이 있는데다가 패트릭이 능력자라는 걸 그들도 알았던 거죠. 패트릭은 퍼셉션 레코드에서 A&R 직책도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2년 앨범 <Don’t Turn Around>의 나머지 수록곡을 녹음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다시 가셨나요?
우리는 필라델피아에서는 그 두 곡만 녹음했습니다. 앨범 나머지 곡들은 뉴욕에 있는 블루 록이라는 스튜디오에서 했고요. 앨범을 녹음하는 데는 몇 달이 걸렸어요. 하지만 레코드가 나왔을 때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더 큰 히트작이 되었지요.
첫 앨범에 들어갈 많은 곡들을 작곡하셨는데요. 두 번째 앨범에서는 패트릭 애덤스와 데이비드 조던 David Jordan이 그 일을 다 맡은 것 같네요. 앨범을 들어보면 첫 앨범에서의 어떤 울림 vibe 같은 것이 <Baby, Won’t You Change Your Mind>에는 없더라고요.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요?
(웃음) 첫 앨범이 나오고 성공을 거둔 덕분에 우리는 공연 투어를 시작하느라 한동안 뉴욕에 갈 수가 없었어요. 실은 스튜어트, 러셀, 저 이렇게 세 명이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간에 (다음 앨범에서는 이렇게 하자 하면서) 아이디어도 같이 짜보고 곡도 같이 쓰곤 했었거든요. 그런데 뉴욕으로 돌아와 보니 패트릭이 와서는 2집에 들어갈 곡 전부가 준비되어 있다는 거예요. 패트릭은 남부에서 상경한 데이비드 조던이라는 작곡가와 일종의 팀을 이루고 있었어요. 우리는 그 사람을 본 적도 없었는데요. 회사 사람들이 두 번째 앨범이 준비되었다고 쉽게 말하더군요. 계약할 때 너무 사인을 빨리 해줘서인지 그때 당시 우리는 힘이 별로 없었거든요. 좀 더 엉겨볼 형편이 못 되었지요. 별달리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어쨌거나 2집은 내야하는 거잖아요. 그 말씀이 맞습니다. 그 결과로 앨범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진 겁니다. 그래서 1집 때 나타난 멤버들 간의 호흡interaction이 부족했던 거고요. 사실 우리의 첫 앨범을 이루는 주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저와 스튜어드와 러셀 간의 호흡이었거든요. 우리가 작곡과 편곡을 손수 하면서 만들어진 호흡이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Don’t Turn Around>를 작업하실 때가 훨씬 즐거우셨던 것 같네요. 특히 “Our Future”같은 곡요.
아 그 곡은 패트릭이 퍼셉션의 다른 아티스트 럭키 피터슨 Lucky Peterson을 위해 작업한 것이었는데요. 패트릭은 럭키 피터슨과 녹음을 마치고 나서도 계속 우리 앨범의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채워야할지 고민 중이었었나 봅니다. 그러더니 패트릭이 우리 다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우리는 여자 친구와 동네 친구들도 부른 상태였는데 다 스튜디오로 들어갔었죠. 패트릭이 이 곡이 녹음된 테이프를 걸더니 얘기를 시작해보라고 합디다. 그래서 우리끼리 농담도 하고 일반적인 수다도 떨고 그랬어요. 그런데 “Our Future”의 주제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를 테면 “파티나 열고 이리저리 어울려 다니는 것이 이 도시를 살아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미래인가?” 그래서인지 우리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거기서 늘어놓고 있었던 거예요.
첫 번째 앨범 크레디트에서 선생님은 보컬 편곡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계신데요. 2집에서는 역할이 적었지요?
2집에서는, 뭐 그다지 없었어요. 그 두 사람 (패트릭 애덤스와 데이비드 조던)은 미리 짜두어 놓은 틀이 있다고 하더군요. 스튜어트와 러셀은 그 앨범 만들 때 노래도 많이 못했어요. 그 둘은 저를 불러다 리드 보컬을 맡기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어요. “그럼 백그라운드 보컬은요?” 그러자 그 두 사람이 대답하길, “걱정 말아.” 그러더군요. 사실 우리 셋이 함께 몇 곡에서 같이 노래하기는 했어요. “Baby, Won’t You Change Your Mind” 같은 곡에서요. 하지만 대부분의 곡에서 데이비드 조던과 패트릭이 백그라운드 보컬을 맡았어요. 그런 일 때문에 얼마간 우리 관계가 불편해졌고 결국 그게 블랙 아이보리와 패트릭이 함께 한 마지막 작업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음반사들은 대개 그룹에서도 리드 보컬의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블랙 아이보리의 앨범 커버를 보면 스튜어트가 중심이 되어 있는데요. 선생님에 대해서 뭔가 다른 얘기가 있었나요?
스튜어트가 미소년이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관과 이미지가 시장을 선도하잖아요. 물론 아주 좋게 생각하고 저로서도 그게 나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다들 제가 리드 보컬인 것을 알고 있잖아요. 쇼에 오셨던 분들은 제 노래를 듣게 되니까요. 그럼 알게 되겠죠. 그 후로도 한 동안은 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흐르고 나니 꽤 구설에 오르더군요.
2번째 음반을 내고 나서 블랙 아이보리는 1973년 투데이 레코드사를 떠나게 됩니다. 결국 부다 레코드로 옮기셨는데요. 떠나게 된 이유는 뭡니까?
2집이 그렇게 되는 것을 보고 떠난 겁니다. 우리가 창의성을 발휘하며 성장을 할 수 없는 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지가 않았어요. 우리는 단순한 가수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가수면서 작곡가였어요. 우리는 편곡을 하고 뮤지션이 되려는 열망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2집은 그런 열망을 모두 앗아 가버렸어요. 우리의 재능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요. 그러다보니 우리 세 사람은 이런 일이 계속될 것 같다고 결론 내렸죠. 그래서 더 이상 있을 생각이 없어졌어요.
공백기에 단발성으로 훵키 싱글 곡을 하나 녹음하셨는데요. 편곡을 맡으신 분이 필라델피아에 자리를 마련해준 빈스 몬태나 Vince Montana (빈스 몬태나 주니어, 역자 주 – 훌륭한 바이브러포니스트이자 필리 사운드와 샐소울 사운드를 두루 거친 거장, MFSB와 샐소울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네요.
그렇습니다. (1974년에 나온) 그 싱글이 콴자 레코드에서 나왔죠. 워너 브라더스 산하 레이블이었는데 제목이 “What Goes Around Comes Around”였습니다. 실은 노먼 해리스 Norman Harris와 싱글을 하나 내기로 계약을 했었어요. 막상 필라델피아에 가보니, 노먼 해리스는 저를 자기가 운영하는 계열사 프로덕션에 떠맡겨버리더군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What Goes Around Comes Around”의 작곡과 프로듀스를 다 해놓았고요. 우리는 날을 잡아 스튜디오에 와서 뒷면까지 노래를 불러주었을 뿐이고 그게 다예요. 우리는 또 마음이 상해버렸죠. 우리는 싱글에 아무런 기여도 못했고 그렇다고 노먼 해리스와 함께 작업하면서 정말로 필리 사운드에 대해서 뭔가를 배운 것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그쯤에 부다 레코드에서 블랙 아이보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콴자 레코드와는 실제로 앨범 계약이었습니까? 아니면 싱글 하나만 내기로 했나요?
앨범을 하나 내기로 했었죠. 그런데 콴자에서 싱글을 바로 내더라고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도대체 모르겠습디다. 어쨌든 싱글이 나오고 나서 거의 반년 동안 그 노래만 불렀고요. 그러고 나서 부다와 계약했어요.
그래서 부다에서는 자리를 잘 잡으셨습니까?
프로듀싱이나 작곡에서 우리의 몫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1975년쯤에) 우리는 어느 두 사람과 짝을 이루게 되었어요. 나름 한다고 하는 쓸 만한 작곡가들이었죠. 하지만 또 작업상태가 좋지 못했어요. 2집할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지요. 그리고 그때쯤, 저는 아티스트로서의 제 성장 가능성과 이 밴드가 제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1976년인가 그때쯤이었을 거예요. 제가 발 벗고 나서서 거기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1977년에, 그러니까 부다와의 계약을 갱신할 때가 왔을 때 저는 계약을 갱신할 의사가 없다고 말해두었습니다.
2편에 계속.
(2015/6/20)
'"F"unkatology' 카테고리의 다른 글
R.I.P Maurice White (1941~2016) (0) | 2016.06.25 |
---|---|
르로이 버지스 인터뷰 -2 (0) | 2016.06.25 |
길 스캇 헤론 (Gil Scott-Heron) 인터뷰 - 2 (0) | 2016.06.25 |
길 스캇 헤론 (Gil Scott-Heron) 인터뷰 (0) | 2016.06.25 |
쉬크 (CHIC)의 나일 로저스 (Nile Rodgers) 인터뷰 (마지막) (4) | 2016.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