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문화 연구소, 이석호 편역.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문화론과 근대성>. 동인.
동인에서 아프리카 문화 연구소의 기획 총서를 펴내고 있는데 이 책은 월레 소잉카의 희곡 선집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프란츠 파농이나 반투 스티브 비코와 같은 혁명가에서부터 치누아 아체베를 비롯하여 얼마 전에 내한했던 응구기 와 시옹오같은 문학인 등의 글을 한데 모아 엮었다. 하지만 나는 제목이 이 책에 수록된 모든 글을 대표한다고 보지 않는다. 게다가 논문들도 장마다 각기 상이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없다. 내 생각에 첫 장에서 파농과 비코, 칼릴과 마즈루이의 글을 다루고 다음 장에서는 아체베와 시옹오의 글을 묶고 중간의 영화, 희곡이론을 삭제했다면 훨씬 좋은 구성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이 책을 읽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구입보다는 도서관에서 대출하기를 권하겠다. 평소 인종 문제나 탈식민주의에 관심이 없다면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읽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파농, 비코, 마즈루이, 아체베 그리고 시옹오의 글 정도가 읽을 만하다고 덧붙이고 싶다. 이 정도의 글만 일별하면 알제리와 남아프리카의 투쟁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아프리카 문학을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 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마르티니크 출신으로 알제리 항쟁의 투쟁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프란츠 파농에 대해서는 이제 겨우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평전과 몇몇 글만을 읽어보았을 뿐이고 본격적인 저서를 읽어보지 못해서 얘기를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77년 남아공 정부에 의해 수감되어 고문과 구타로 생을 마감한 투쟁가 비코 또한 우리나라에 평전이 소개되어 있는데 파농과 비코의 글은 그들의 삶만큼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파농과 비코의 글은 네그리튀드의 문제를 놓고 케냐의 역사학자인 알리 마즈루이의 글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네그리튀드란 마르티니크 출신의 시인인 에메 세제르가 고안한 개념으로 "흑인성"으로 번역된다.
파농과 비코와 같은 경우, 네그리튀드의 문제는 중요하다. 피억압자로서 흑인은 투쟁에 앞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먼저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쟁의 주체를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파농과 비코의 글에서 핵심적인 문제다. 모든 투쟁가들이 그러하듯이 파농과 비코 같은 경우는 둘 다 맑스의 분석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보다 신중한 파농과는 달리 비코의 글은 거침이 없다. 특히 비코에게서 나타나는 백인 부르주아와 흑인 프롤레타리아의 도식은 흑인들의 투쟁에 있어서 극명한 선악대비를 부여하여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간소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어느 정도 정당한 분석인가는 논평을 보류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론 상의 조야함은 투쟁가의 공통된 현상이기 때문에 섣부른 비판이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조금이나마 훼손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이것은 내가 오래두고 볼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에 대해 마즈루이가 제기하는 문제는 네그리튀드의 다른 위험한 얼굴이다. 이글은 매우 박식한 글이지만 또한 너무 난삽해서 읽고 싶은 생각이 떨어지는 글이다. 언젠가 내가 소개했던 헨리 루이스 게이츠의 글도 이러한 맥락이었는데 차라리 이 글을 소개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쉽게 말하면 네그리튀드가 백인 남성에 대한 흑인 남성들의 투쟁슬로건으로 수용되면서 유대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고 게이나 여성에 대한 혐오를 숨김없이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네그리튀드는 흑인에게서 흑인으로 이어지는 흑인다움이다. 항상 흑인 남성 일반의 구성요건이며 구전이나 직관으로만 전승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러한 위험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Funk에 대해 글을 쓰다니 오르가즘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네그리튀드와 관련한 몇몇 문헌들은 단어들만 바꾸어 놓으면 나치 선전물과 다를 바 없이 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군다나 네그리튀드가 문화 이론으로 활용되면서 프로이트 이론과 흡착되어 나타나는 것이 그 악명높은 Funk론이다. 백인/부유함/합리성/죽음/차가움과 대비되는 흑인/빈곤함/감성/생명/따스함이 그것이며 이러한 이분법적 도식으로 사회 문화적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저명한 흑인 음악 평론가 리키 빈센트의 글에서 토니 모리슨의 글이 어떻게 차용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국내에서 일부 흑인음악 팬들이 Funk와 Soul을 설명할 때 이러한 도식을 맹목적으로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개탄할 만한 일이다. 내가 보기에 네그리튀드는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다. 네그리튀드는 양면적이다. 주체화의 원리인 동시에 또다른 배제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투쟁의 현장에서 흑인 민중을 결집시키는 강력한 주술로서 작용하지만 때로는 흑인 투쟁가들의 이론에 대한 속류적인 해석이 흑인 파시즘을 가능케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얘기다. 게다가 직관과 비합리성에 대한 강조는 아프리카 특유의 문어부재의 전통을 강화하고 원활한 소통을 저해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소통없는 투쟁이 가능한가?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이론적 토대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흑인 문학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문학의 역할이나 효용과 관련하여 좀 더 생각해 볼 여지를 제공한다.
이 책을 덮으면서 맑스주의나 세계 각국의 투쟁사 등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했다면 보다 밝은 눈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만 남는다. 이 글을 대부분 우리말로 옮긴 이 석호 교수님은 외국어대학에 재직하고 계시고 우리나라에 아프리카 문인과 지식인들의 글을 열심히 소개하시는 분이며 아프리카 문화 연구소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나는 아프리카 문화 연구소에 계시는 분들의 작업이 인종문제, 특히 흑인문제에 둔감했던 한국 사회에서 매우 값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한 번 더 소화해내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주의의 문제와 연계시키려는 노력은 차후에 기대할 수 있겠지만 문학이라든가 문화 소개에만 급급하여 현재 아프리카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 예를 들어 다르푸르 인종청소나 제약자본의 횡포, 식민잔재의 청산 같은 중요한 문제들을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이 아쉽다.
번역은 매끄러운 편인데 매끄러운 번역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정확성은 신뢰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석호 교수님은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로 번역상까지 수상하신 분인데, "비로소"를 "비로서"라고 표기한다든가 "천애고아"를 "천의고아"로 소리나는대로 쓴다든지 "자료들이 ~~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는 주어 서술 관계의 부조화 같은 오역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겨레 신문사에서 나온 정문태씨의 책과 같은 오탈자의 천국은 아니지만 공들인 교열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내 유일의 아프리카 연구단체라는 점에서 더욱 막중한 책임이 요구된다.
(20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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