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Funk> 2-1 - 1960년대

Baron Samdi 2016. 6. 24. 13:19

-제 2부-

최초의 훵크 시대 (1969~1972) - 어둠 속으로 빠져들다.

5장

1960년대 : 만약 6이 9였더라면 (90년대도 60년대 같았더라면)

“흑인 혁명 없이는 훵크도 없다.” - 그렉 “쇼크 지” 제이콥스

(Greg "Shock G" Jacobs - 투팍 샤커가 한때 몸담았던 랩 그룹 “디지털 언더그라운드의 리더이자 래퍼 - 역자 주)



공민권과 꿈

1960년대는 미국 전역에 걸친 변화의 시대였다. 즉 미국의 젊은이들이 잠에서 깨어 그들의 신세계로 향하였고 가장 능글맞은 태도로 사람들을 억압하던 제도에 맞서던 시기였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빠져있던 완고한 중산층적인 가치들을 거부함에 따라 전국은 “세대 차이”를 느끼기 시작했다. 고결한 미국적 관념이라는 소박한 환상은 미국의 사악하고 인종주의적이며 폭력적인 현실이라는 벌거벗은 진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 가운데 중립지대는 거의 없었다. 음악은 이러한 젊은이들과 함께 서로를 성숙시키면서 그리고 새로운 수준의 독립성과 의미를 향해 성장해가면서 그들을 따라갔다.
남부의 인종 분리정책에 맞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도전에 영감을 받은 흑인 학생들은 1960년 사우스 캐롤라이나 그린스보로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갔고 1961년에는 모든 인종의 학생들이 “프리덤 라이드 (역자 주 - 인종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한 미국 남부 순회 버스 시위)”와 민권 운동을 위한 행진에 모여들었다. 가스펠 곡 “누구도 내게 등을 돌리지 않도록 해 주세요 Don't let nobody turn me round”의 구절이 버스 속에서 울려 퍼졌다. 남부의 인종차별에 맞서 교회에 다니는 흑인들이 주도한 저항들은 불매운동, 연좌농성, 준법 투쟁, 행진, 연설 등의 형태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사소한 승리들이 쌓여나감에 따라 젊은이들, 예술가들, 인습 타파론자들, 노동운동가들,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 중심의(대개 중산층인) 흑인 활동가들과 연합에 운동으로 조직되었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으로도 성숙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1963년 3월, 워싱턴에서 킹 목사가 그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로 시작되는 연설의 절정에서 오래된 흑인 영가의 노랫말인 “마침내 자유가! 마침내 자유가! 전능하신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마침내 저는 자유롭습니다.”라고 외칠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흑인 교회신자들이 주도하던 급진적이고 새로운 운동을 통해 거리에 나타난 새로운 음악도 교회 음악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민권 운동에 관한 노래들은 가스펠의 가락으로 업데이트되어 거리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샘 쿡Sam Cooke의 위대한 곡 “A Change Is Gonna Come”, 임프레션즈The Impressions의 “Keep on Pushing” 그리고 스티비 원더의 “Heaven Help Us All"은 개인적인 이슈를 벗어나 보다 상위의 힘Higher force을 다루고 사회에 대해 말하는 흑인 대중음악의 초기 모습들이었다.
“스테이트먼트 뮤직Statement Music - 흑인들의 정치적인 욕구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내용의 음악 - 역자 주"으로서 리듬 앤드 블루스 는 소울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흑인 민권 운동 시기에 약속되었던 변화들이 채 성숙되기도 전에 실패한 이후로는 보다 노골적인 저항의 태도를 취했다.

1957년, 1960년 그리고 1964년의 민권법과 1969년의 주택 임대상의 인종차별 금지법 그리고 여타의 불만사항들을 교정하기 위한 활로들이 허락된 되었음에도 미국의 흑인 대중들에게 변화는 사소한 것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에 걸친 한 세대 동안 도시의 북적이는 셋집에 살며, 무직에 백인들에게마저 일자리를 빼앗겼으며 54년 인종간 학교분리 금지법이 통과된 뒤에도 여전히 아이를 뒤떨어진 학교에 보내야 했던 일반적인 흑인 노동자들은 여전히 없이 살았으며 앞날이 깜깜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좌절은 시카고의 흑인 단체 “이슬람 사원 Nation Of Islam”, 이하 NOI)을 주제로 대변인 말콤 엑스가 등장했던 CBS의 시사 프로그램 “증오가 낳은 증오 The hate that hate produced"가 방송되기 전까지는 공개적으로 표명된 적이 없었다. 박탈당한 미국 흑인의 관점을 취하고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미국 흑인들의 현실을 지적한 사람, 그가 바로 말콤 엑스였다.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이미 게토(흑인 거주 지역)에 만연한 실업, 무주택, 열등한 교육으로부터 뿌리내린 이 사회적인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일 사람은 필요 없다. 이 폭발적으로 범죄적인 환경은 오랫동안 존속해왔다. 여기에는 뇌관이 따로 필요 없다. 이것 자체가 뇌관이다. 이것은 그 내부로부터 자체적으로 폭발한다.

킹 목사와 말콤 엑스의 상징적인 논쟁은 “흑인 문제Negro Question”라는 오래된 딜레마를 반영하는 듯 했는데, 그것은 미국이 흑인을 위한 곳인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다. “흑백 통합주의자”가 되건 “흑백 분리주의자”가 되건 흑인들에게는 명확한 선택이 아니다. 킹 목사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일하는 꿈을 꾸었던 반면에 말콤 엑스는 흑인들이 자신의 운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단호한 태도를 가졌다. 두 지도자는 서로를 평가하고 서로의 입장으로부터 배웠으며 할렘 르네상스 이후로 핵심적인 미국 흑인들이 누려왔던 가장 강력한 지도자상을 제시했다.
그 중 말콤 엑스는 흑인 민족black nation의 잠자는 거인이라 할 수 있는, 가진 것 없이 박탈당한 흑인 젊은이들에 대한 호소력을 지녔으며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아도 (주류 사회에 대한) 반란에 가장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미시건 주의 더럽고 가난한 촌아이로 자라나 감옥에서 “이슬람 사원NOI"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몇 년을 할렘 길거리에서 부랑배로 살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결국 사원을 떠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에게 그 역시 가난한 자의 신분으로부터 나온 롤 모델로써 마음을 쏟도록 했다.
말콤이 죽은 후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말콤이 암살당하면서 - 아마도 마커스 가비 사후의 처음이었을 - 희망으로 차올랐던 사람들의 마음에는 공허함만이 남았다. 현대 시인 에더리지 나이트Etheridge Knight는 시 “그것은 훵키한 거래였지 It Was a Funky Deal"에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말콤 엑스를 기렸다.

그것은 훵키한 거래였지.
오로지 진짜는 붉은
그의 붉고 붉은 수염 가운데 붉은 피.

그것은 훵키한 거래였지.

태초에 말이 있었지.
그리고 끝에 가서는 행동이 있었지.
유다가 예수에게 했던 (말콤 엑스는 흑인들에게 살해당했다 - 역자 주)
같은 무리들을 위해. 같은 이유로.
당신은 그들을 미치게 했어. 말콤. 같은 이유로.

그것은 훵키한 거래였지.

당신은 풍파를 너무 일으켰어, 친구
여러 사람 얽어맸고
하지만 허튼 소리들 속에서 보았네.
당신이 거친 놈들에게 다가서던 것을.
나같이 거친 놈들에게.

그것은 훵키한 거래였지.



말콤 엑스가 사망한 후로 상황은 더욱 훵키해졌다. 흑인 운동은 보더 더 강렬하고 명확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1965년 2월에 말콤 엑스가 암살당했을 때, 미국 흑인들에게는 인종평등회의(CORE), 학생 전국 비폭력 조정위원회(SNCC), 그리고 킹 목사의 조직 남부 크리스턴 리더쉽 총회가 있었다. 그러나 말콤의 죽음은 운동에 극적이고 새로운 방향을 의미했다. 많은 흑인 젊은이들에게 말콤의 피살은 폭력적인 체제 내에서 비폭력은 가식임을 확언해주는 것이었다. 전 세대에 걸쳐 인내심은 사그라졌다. 그 해 8월, 전국을 휩쓴 첫 번째 대규모 폭동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났다. 그 폭동은 몇 주간 계속되어 몇 블록이 불에 타고 39명이 사망했으며 그 후유증은 십년 동안 로스앤젤레스를 강타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라디오 디제이였던 매그니피션트 몬태규Magnificient Montague는 도시가 불타는 동안 크리에이터즈Creators의 “불태워 자기야! 불태워!Burn, Baby Burn”를 계속 틀어대서 논란을 일으켰다.) 와츠 폭동은 누군가에게는 비극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투 개시 신호였다. 누구도 그것이 마지막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필수적인 충격이었고 분노의 소리가 이어졌다. 연방 정부는 그 폭동의 원인을 “연구”해야 했고 압박은 가중되었다. 마침내 폭동은 미국 흑인들에게 저항의 양식이 되었다.

 

 

(20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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