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Funk> 2-14 - 아프리카 (나를 다시 돌려 보내주오)

Baron Samdi 2016. 6. 24. 14:17

아프리카 (나를 다시 돌려 보내주오)


 

뉴 올리언즈의 음악은 아프리카에서 훵크를 하는 사람들에게 리듬의 광대한 균열을 열어보였다. 그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으며, 그동안 서양 쪽으로 귀를 기울였던, 대서양 건너 남 아프리카에서 모로코에 이르기까지의 아프리카의 뮤지션들은 훵크를 듣고 내면화해서 그들 방식대로의 훵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다재다능한 색소포니스트 매뉴 디방고Manu Dibango는 1972년 중요한 곡 “Soul Makossa"를 녹음했는데, 그는 자신의 음악에 훵크를 도입한 최초의 아프리카인 중 하나였다. 재치있는 아프리카 콩가 리듬에 점점 소멸하는 듯한 훵키한 리듬 기타와 그 위에 디방고의 흥겨운 애드립이 더해진 이 빠른 페이스의 클럽 히트곡은 훵크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미국의 흑인 라디오 채널에 아프리카 음악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곡들은 쿨 앤드 더 갱이 1973년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게 했던 곡 ”Jungle Boogie"에도 영향을 주었다.) (전자화된 전통 리듬 격인) 하이 라이프에서부터 제임스 브라운의 훵크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의 음악으로부터 나온 그루브를 통해서, 디방고는 많은 미국 소울 팬들에게 아프리카 음악의 전도사로 인식되었다.


 

그 영향을 보다 가속화시켰던 사람은 바로 나이지리아의 밴드 리더였던 펠라 아니쿨라포 쿠티Fela Anikulapo Kuti로 특히 1970년 아프리카 투어 중에 있던 제임스 브라운을 만난 뒤부터 제임스 브라운 훵크를 받아들여 아프로-비트 그루브로 연주 범위를 확장시켰다.


 

짧게 끊어치는, 그리고 뒤틀린 리듬 기타를 통해, 팬들의 도회적인 취향을 쿠티의 나이지리아 그루브로 이끌어가는데, 그와 동시에 수많은 관악기들과 키보드 솔로들이 그의 장기인 20분 이상의 대곡을 빛내준다. 쿠티는 “음악은 무기다.”라고 천명하고 “흑인 대통령Black President”, "식민지 근성Colonial Mentality" 그리고 “선생님, 말도 안되는 것 좀 가르치지 마세요Teacher, Don't Teach Me Nonsense”와 같은 곡을 발표하면서 극도로 강경한 정치적 태도를 취했다. 쿠티는 그의 음악이 가지는 정치적 사명을 다른 차원으로 가져가 결국 나이지리아 정부와 맞서고 1983년에는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한다. (그 결과, 1977년 쿠티의 저택에서 거의 그를 살해할 뻔한 공격이 있었다.) 제임스 브라운은 쿠티를 일컬어 “아프리카의 제임스 브라운”이라고 했는데, 훵크 그루브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담대한 정치적 식견과 그에 따른 정권의 억압을 받아야 하는데, 훵크 그루브와 이러한 식견은 매우 유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훵크에는 여전히 독특하게 미국적인 것이 남아있다.


 

훵크는 언제나 중서부 도시를 들썩이게 하고, 제임스 브라운이 가는 걸음마다 보다 복잡하고 의미를 지닌 형태로 발전해 남부 식으로 변용시킨 리듬 앤드 블루스 잡탕의 일부였다. 제임스 브라운의 전기를 쓴 신시아 로즈Cynthia Rose가 부기하듯이, “훵크는 전혀 성질이 다른 두 개의 리듬들의 조화가 아니라, 그 리듬들의 본질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융합인 동시에 초월이다.” 1960년대 사회 각 계층에서 일어난 엄청난 억압들은 외적인 갈등을 만들어내었던 반면 자의식과 대부 제임스 브라운의 확고한 에너지는 내적인 갈등을 생성했는데, 이는 곧 폭발하게 된다. 그것은 총체적인 그루브에서 나오는 리듬의 폭발, 바로 그 “폭탄”, 제임스 브라운 사운드였다.

 

(2009/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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