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헨드릭스
사람들은 지미 헨드릭스를 철저하게 오해해왔다. 헨드릭스는 음악에서 록적인 전통의 일부, 그것도 “백인” 전통의 일부였었고, 현재에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가 미국 흑인들의 전통 속에 있고 미국 흑인의 음악을 훈련받았으며, 모두 흑인으로 이루어진 밴드들과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흑인 음악가로서의 그의 인생은 정체성과 유산 모두에서 주된 것이지만 대부분의 록음악의 역사는 록의 관점에서 헨드릭스를 배타적으로 다루고 있다.
지미는 1942년 시애틀에서 음악과 관계있는 일을 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을 탐구하고 즐기도록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지미를 응원했으며 그의 첫 기타를 사주기도 했다. 지미는 인종이 뒤섞인 환경에서 자라났으며 재즈 기타리스트인 찰리 크리스천Charlie Christian(처음으로 전기 기타를 도입하고 40년대에는 밴조를 포크 음악에나 쓰이는 악기로 만들어버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로큰롤의 거물들인 빌 헤일리Bill Haley, 보 디들리, 척 베리 그리고 패츠 도미노로부터 음악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가 고등학교 때 몸담았던 첫 번째 밴드는 로킹 킹즈the Rocking Kings라는 흑인 R&B/록 밴드였다. 그의 거친 기타는 다른 밴드 멤버들로부터 질투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여학생들을 미치게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시애틀의 로컬 신에서 몇 번의 좌절과 노력 끝에 지미는 17살의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입대하게 되었고 마침내 켄터키에 있는 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켄터키의) 컨트리 블루스는 그에게 지대한 충격을 주었는데, 그는 내쉬빌 근처의 흑인 지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블루스 가수들의 도회적임과 동시에 토속적인 사운드 그리고 마-케이스the Mar-Keys와 부커 티 앤드 더 엠지스와 같은 역사적으로 이름난 멤피스 사운드에 빠져들었다. 그는 군대에서 같은 동료 흑인 부대원인 드러머 게리 퍼거슨Gary Ferguson과 베이시스트 빌리 콕스Billy Cox와 트리오를 결성했다. 콕스는 지미와 가까워졌고 그가 명성을 얻은 뒤에도 함께 하게 된다. 지미는 음악가들의 세계를 원하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는 말수가 적었지만 그의 신실함은 그가 연주할 때마다 증거가 되었고 사람들은 연주를 한 번 듣기라도 하면 그의 재능을 확신하게 되었다.
헨드릭스는 1963년에 제대하면서 리틀 리차드에게 발탁되었다. 그 후 탈퇴하면서 세인트 루이스에서 훵키한 남부 스타일의 또 다른 왼손잡이 기타리스트(역자 주 - 지미 헨드릭스도 왼손잡이였다.)인 앨버트 킹Albert King의 밴드에 합류했다. 킹은 기타 피크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지미 티본 워커Jimi T-Bone Walker스타일의 “기타줄 쥐어짜기Squeezing strings”를 가르쳐 주었으며, 연주를 들어주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헨드릭스는 1963년 말에 할렘에서 리드 기타리스트를 구하고 있던 R&B밴드에 들어가게 된다. 로니 아이즐리Ronnie Isley가 돌아오는 아이즐리 브라더즈의 버뮤다 투어를 함께 할 리드 기타리스트를 구하러 팜 카페Palm Cafe에 갔다가 그를 채용한 것이다. 헨드릭스는 아이즐리 브라더즈의 밴드에서 거친 무대 매너를 보여주고, 혀를 날름거리면서 기타를 물어뜯으며 요란한 머리두건을 하고서 대부분을 자신의 기타 솔로로 채우면서 성장해나갔다. 그는 하룻밤에 30달러를 벌었지만 불평이 없었다. 1964년, 그리고 1965년에는 커티스 나이트Curtis Knight와 아이즐리 브라더즈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할렘에서 가장 유명한 세션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이이즐리 브라더즈의 “Testify Parts 1&2"를 들어보라.) 그 당시 지미의 여자친구는 페인 프리전Fayne Pridgeon이라는 흑인 여성으로 종종 지미의 요란한 옷차림을 공적으로 변호해야만 했다. 그녀는 지미를 그녀의 아이와 두 친구가 함께 살고 있던 집으로 데려갔다. 제임스 브라운이 감옥에서 막 출소했던 때와 같이, 지미 또한 흑인의 사회적 연결망 속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할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곳을 떠나자, 그는 혼자가 되었다.
지미는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그만큼이나 요란하게 차려입은 히피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체임버스 브라더즈the Chambers Brothers, 블루스 가수 타지 마할Taj Mahal, 그리고 스피리츄얼 포크 가수 리치 헤이븐스Richie Havens와 같이 보헤미안적인 모임에서 활동하는 흑인 아티스트들이 있었지만, 그중 어느 누구도 헨드릭스만큼 주류의 인기와 대중의 경멸을 동시에 받은 사람은 없었다. 애니멀스the Animals의 베이시스트였던 체이스 챈들러Chas Chandler는 어느날 밤 볼품없는 클럽에서 연주하고 있던 그를 “발견"했고, 지미는 미국 살림을 모두 청산하고 챈들러와 함께 런던으로 날아갔다. 그에게는 밴드와 연주할 장소와 레코드 계약서가 주어졌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는 곧 정상을 차지했다. 그는 로큰롤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1970년에 그가 사망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록이라고 했다.)
그는 1967년 6월에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돌아와 공연의 인기 스타였던 후the Who보다 더한 주목을 받았다. 이 공연의 테이프를 본 사람이라면 음악의 새로운 전기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덤불같은 머리카락은 최면적인 시선, 조금은 아시아인의 느낌이 나는 광대가 두드러진 그의 넓은 얼굴, 얇은 염소수염과 콧수염이 강조된 날렵한 이목구비, 그의 뒤틀린 입 사이로 혀를 빼물면서 격렬하고 교묘하게 기타줄과 레버를 당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외양은 항상 물감이 튄 듯한 요란한 옷에 괴상하게 실로 짠 옷, 변종 같은 옷깃과 큰 금속 버클을 단 나팔바지, 그리고 예의 붉은 머리 수건이 그의 (왼손잡이를 위한) 거꾸로 된 기타와 어우러져 믿을 수 없는 효과를 자아냈다.
기타로 잠재의식의 청각적 풍경을 탐구하는 능력을 보여주면서 그리고 여전히 블루스의 훅을 구사하면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는 1967년 봄에 데뷔 앨범 <Are You Experienced?>를 발표하면서 록 음악 신에 폭풍을 몰고 왔다. 하지만 지미에게는 이것이 막 시작이었다. 그의 2번째 앨범인 <Axis : Bold as Love>의 수록곡인 “If 6 was 9”에서 헨드릭스는 그가 직면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문화적인 이분법을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를 입으신 보수당 지지자께서
번개같이 길을 따라 달려오면서
고무 손가락으로 내게 손가락질을 하지.
나같은 인간들이 얼른 거꾸러져 뒈지길 바라겠지만
난 내 괴상한 깃발을 높이 높이
흔들어댈테야.
흔들고 또 흔들고
태산아 무너져라. 무너져도 내게는 제발.
계속해봐 사업가 나으리.
그래도 나같은 옷은 못 입을 걸.
-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6이 9가 된다면” (1967)
잼의 시작을 알리는 블루스의 리프들을 압도하면서 우주적이고 자유로운 형태의 그루브를 따라 가사가 흘러나온다. 우주적인 사운드는 이전의 록 음악이 경험하지 못했던 실존의 배경으로 나타난다. 잼이 더욱 확장되면서, 지미의 이러한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내가 죽을 때가 되면/ 난 죽을 사람이야/ 그러니 내 삶을 살게 내버려 둬/ 내가 원하는 대로”
(201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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