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Funk> 2-31 - 삶을 위한 시간

Baron Samdi 2016. 6. 24. 16:24

삶을 위한 시간

1973년에 이르자, 정착해서 아이를 가진 슬라이는 팬들의 기대와 언론 보도의 소용돌이에서 회복하는 듯 보였으나 다시 음악을 녹음하기 위한 적당한 기회를 찾을 수 없었다. 1974년이 되어, 그 해 발표한 흥미로운 앨범 <Small Talk>의 커버에서 그의 여자 친구 캐시 실바Kathy Silva와 아이(밝은 표정의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모습이 나와 있는데, 그 중에서 많은 놀라움을 가져다 준 것이 바로 “Time for Livin'"이라는 곡이었다. 왜냐하면 슬라이가 음악의 전선에서 물러나서 평화로운 은퇴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1975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결혼식을 겸한 콘서트로 주목을 받고 난 뒤부터, 그는 점점 모습을 감추는 듯 했으며 그가 제작한 음반들은 차트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가끔 밴드 멤버들인 마티니, 동생 로즈, 그리고 로빈슨과 연주만 할 뿐이었다.

 

1977년에는 “Dance to the Music"의 ‘디스코’ 리믹스가 발매되었는데 이는 더 이상 슬라이의 입지를 강화하지는 못할, 한 물 간 행동처럼 보였다. 1979년이 되자, 슬라이는 위대한 훵크 밴드의 리더인 조지 클린턴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슬라이는 이후 조지 클린턴, 그리고 그의 측근들과 함께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콘서트를 열었는데, 종종 무대 공포증을 겪기도 했다. 쇼가 거듭될수록 슬라이는 쇼에 머리만 내밀거나, 몇 소절만 부르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는 조지 클린턴과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P-훵크 곡에서 등장하기도 했다. 훵카델릭의 “Funk Gets Stronger", P-훵크 올스타즈의 "Hydraulic Pump"같은 곡들이었다.

 

1981년에 슬라이와 클린턴은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된 이후부터는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프린스가 1980년대 중반에 슬라이 스톤과 곡 작업을 함께 하는 데 흥미를 가졌다고 하는데, 프린스의 추종자 중의 한명이자 더 타임The Time의 기타리스트면서 1984년에서 1987년에 이르는 동안 성공적인 솔로 활동을 했던 제시 존슨Jesse Johnson은 슬라이 스톤과 계약을 맺고 “크레이지Crazy"라는 듀오(역자 주 - 이는 저자의 오해로 "Crazay"는 이 듀오의 히트곡이었다.)를 결성했는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슬라이는 바-케이스와의 협업으로 1989년 "Just Like a Teeter Totter"를 발표했는데, 이는 그가 이제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표지였다. 하지만 그의 음성은 이제 패밀리 스톤의 곡을 샘플링한 랩 곡에서 들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디지털 언더그라운드Digital Underground의 "Humpty Dance", 재닛 잭슨의 "Rhythm Nation" 그리고 패밀리 스톤의 곡을 샘플링했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어레스티드 디벨롭먼트Arrested Development의 "People Everyday" 등이다.

 

슬라이 스톤의 등장이 가져온 충격은 흑인 음악 내에서는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슬라이는 제임스 브라운만큼이나 강렬하지만, 아직까지도 신선하고, 누구나 접근 가능한 훵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모타운 레코드는 "Dance to the Music"을 차용하여 1968년 말에 템테이션즈the Temptations로 하여금 "Cloud Nine"을 발표하게 해서 돈을 벌었다. 다른 훵크 밴드들은 제임스 브라운보다 “보편적인” 주제와, 가벼운 기타 사운드를 쓰고, 키보드를 강조하는 슬라이의 리듬 편성을 따라했다. 쿨 앤드 더 갱,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 그리고 워War가 제작한 음반의 리듬 편성과 주제 선택에서 슬라이 스톤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1970년대의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밝고 화려한 리듬의 스펙터클은 슬라이의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재즈 훵크 계의 거장인 허비 행콕Herbie Hancock은 그의 기념비적인 음반인 <Headhunters>에서 슬라이에게 헌정하는 곡을 제작한 바 있다. 그 음반은 슬라이의 정열적인 개성만큼이나 독특한 것이었다. 또한 디스코-훵크 열풍은 슬라이의 재미를 추구하는 훵크에 기반한 것으로, 케이시 앤드 더 선샤인 밴드K. C and the Sunshine Band, 커모도어즈the Commodores, 그리고 오하이오 플레이어즈가 70년대 중반 수백만 장의 음반을 팔아치울 수 있었던 것도 슬라이 스톤의 댄스 훵크 덕택이었다. 그러나 아티스트들이 가사 면에서든, 컨셉트 면에서든 이 영향을 드러냈건, 드러내지 않았건 간에 그들의 앨범들은 이를 명심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슬라이는 자기 충족적인 음악적 구성에 여성을 연주자로 편입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의 밴드는 이 점에서 독특했으며, 평등에 대한 음악적 주제들은 다른 아티스트들에 의해 열성적으로 추종되었다. 하지만 소수의 아티스트들만이 여성과의 강한 직업적 유대를 발전시켰을 뿐이다. 1970년대의 샤카 칸 앤드 루퍼스Chaka Kkan and Rufus, 패티 라벨Patti LaBelle, 미니 리퍼튼Minnie Riperton정도만이 음악을 창의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도로 발전시킬 수 있었을 뿐, 너무나 적은 수의 여성 연주자만들이 자신의 길을 열어갈 수 있었다. 보편성과 자유의 측면에서, 훵크와 흑인 밴드들의 시대는 여전히 흑인 남성에 의해 주도되는 운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훵크 밴드들은 정체성 면에서 슬라이 앤드 더 패밀리 스톤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다. 그는 음악적인 면이나 사회적 통합의 면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알려지지 않은 자극제였다. 영적인 사회에서 그가 태어났더라면 그는 아마도 예언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 대신에 그는 음악적 범주의 한계 위에서 존재함으로써 훵크의 충격을 가져온 중추적인 연주자 정도로 오해받았다. 대부가 문을 열어젖혔다면, 슬라이는 모든 사람을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일체감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실베스터 스튜어트(슬라이 스톤)이 음악에 가져 온 가장 풍요로운 선물이었다.

 

(20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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