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Funk> 5 - 제임스 브라운의 등장

Baron Samdi 2016. 6. 24. 12:40

 

누구에게 훵크가 있나?


훵크는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본능적인 수준에 존재한다. 땀에 젖은 댄스 플로어에 새로운 춤이 나타날 때마다, 마구 뿌려댄 싸구려 향수냄새가 날 때마다, 두껍고 붉은 입술에 발린 립스틱이 쪼~옥!하고 찍힐 때마다 그곳에 훵크가 있다. 360도 회전 덩크에, 아프리카 스타일의 옷차림과 땋은 머리에, 장식된 후드가 있는 재는 폼으로 꺼덕이며 돌아다니는 분홍빛 캐딜락에, 흑인 아이들의 말쑥한 머리모양에, 고풍스런 흑인 민중의 삶이 미국 문화로 통합될 때, 훵크는 이러한 창조적인 흐름의 통로가 된다. 훵크가 흑인 민중이 리듬과 춤, 체액과 태도를 통해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수단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의 엉덩이)은 훵키하다. Every-booty is funky.

먼저 1960년대 후반은 훵키했다. 미국 흑인들의 투쟁적인 분위기는 백인들이 흑인들의 권리를 통제하거나 결정하던 기존 사회의 형태를 폭로해버렸다. 더 이상 소외받지 않았으며 더 이상 뒷문을 쓰지 않아도 되었으며 또한 흑인 민중들은 1970년까지는 미국 어디에나 갈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맥빠진 삶을 발랄하고 자연스럽고 감각적으로 만들었다. 시끄러운 지방 선거에서부터 공직 사회로의 진출, 스쿨버스 강요에 반대하기, 백인 거주 지역으로의 이주, 3배로 증가한 인종 간 결혼, 흑인 연예 산업의 폭발적 증가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사회적 구조는 전도되었다. 그 결과, 국가와 사회의 본질적인 요소는 흑인 민중의 방식으로 갑작스럽게 전환되었다.

훵크의 개념과 중요성은 미국 흑인이 지닌 삶의 깊이, 특히 한 번도 통합된 적 없는 미국 흑인만의 고유한 측면으로부터 나온다. 훵크와 훵키함은 말콤 엑스가 “들판의 흑인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의 생활방식 중의 하나다. 그들은 소작인과 노예로 고된 노동을 하던 사람들로 오늘날까지 도시 중심부에서 삶을 연명해나가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 곧, 1960년대에는 “게토”에 오늘날에는 도심지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1965년에는 와츠에서, 1967년에는 뉴와크와 디트로이트에서 그리고 1992년에는 로스 앤젤레스 사우스 센트럴 지역에서 봉기했고 지금까지 분노를 거두지 않고 있다. 이 사람들은 시인 에더리지 나이트가 “나같이 거친 친구들”이라고 말한 사람들이다.

1965년에 말콤 엑스가 사망하자, 말콤이 했던 것과 같이 의미있는 방식으로 소외된 흑인 민중들에게 말은 건네는 민권 운동가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스토클리 카마이클, H. 랩 브라운, 엘드리지 클리버, 휴이 P. 뉴튼, 앤젤라 데이비스와 같이 떠오르는 흑인 혁명가들은 투쟁을 지속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그 거친 친구들”의 영감과 태도를 포착하고 형상화해낸 사람은 바로 소울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이었다. 제임스 브라운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하여 깨닫도록 권유했다. 그는 소외된 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특별한 방법을 이해하고 통달했다. 그는 가난한 자 중에서도 가장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그의 남자다움이라면 모를까 정치학만큼은 그리 과격하지 않았다. 말콤의 사후에, “새 가방 New Bag"1)을 들고서 미국 흑인의 분노를 잘 잡아낸 사람이 바로 제임스 브라운이다. 1968년 킹 목사의 암살 이후 대중의 분노를 억누르도록 한 사람도 또한 그, 제임스 브라운이다. 그는 마빈 게이의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거야? What's goin' on"라는 물음에 엄하고 단호하게 대답한 사람이다. 제임스 브라운과 그의 밴드는 1970년대, 미국 흑인 사회의 확고한 반성에 음악으로 토대를 닦아 주었다. 그 당시의 희망과 절망과 매혹, 유행과 추저분함과 용서할 수 없는 진실들 속에서.


폭탄.


소울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은 미국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그것은 분노한 미국 흑인들이 실제에서 가능하기를 바라는 미학적인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제임스 브라운을 경험할 때 나타나는 힘과 멋과 훵키함은 1970년대의 여명기를 맞고 있는 미국 흑인들의 경험을 확언하고 긍정하는 것이었다. 정치가와 활동가들이 대개 암살당하거나 시류에 영합함으로써 미국 흑인 사회의 전망을 부여하고 유지하는 것은 이 대부의 손에 맡겨졌고 그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훗날 스티비 원더나 조지 클린턴과 같은 음악가들이 흑인 사회의 꿈을 대변하는 화신을 자처했지만 훵크의 중심이자 “흑인(남성)”의 전체성과 완벽함을 대변하는 것은 제임스 브라운뿐이었다. 브라운은 정치적인 흑인, 성공한 흑인, 성적 매력이 있는 흑인을 표상했으며 “검은 색이라서 자랑스럽다”고 외치는 용맹한 흑인 전사였다. 그가 곡에서 “무릎을 꿇고 사느니 고꾸라져 죽겠다.”2)고 노래했듯이 말이다. 브라운은 흑인들이 가진 열망을 지배할 수 있는 지배력을 얻었고 다시는 그것을 놓지 않았다.


그의 밴드는 이런 진지한 메시지를 연속 안타같이 맹렬하고 가차없는 R&B 리듬으로 지원사격을 해줬고, 그들의 원초적인 리듬은 너무 중력이 강해서 블랙홀과 같이 세계의 음악들을 핵으로 끌어들였다. 리듬의 구조들을 정반대로 바꿔서 다운비트(4박의 제1박)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대부는 새로운 대중음악의 유행에 시동을 걸었고 동시에 아프리카의 리듬과 결합했다. 제임스 브라운의 노래들을 첫 박에 강세를 두었지만 마치 빈 공간을 헌납하지 않으려는 듯, 2박과 4박에는 맹렬한 기세의 남부 흑인 풍의 블루스 드럼 비트를 얹었다. 필요한 변화는 무엇보다도 소리치고, 기성을 지르며, 온 무대 위를 “소울풀함”의 중심으로 만들며, 모든 몸짓을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소울 브라더 넘버 원(제임스 브라운의 별명) 그 자신에 의해 모두 이루어졌다.

슬라이 스톤을 비롯하여 다른 뮤지션들이 이렇게 만들어진 리듬의 광기 위에다 윙윙거리는 기타와 쥐어뜯는 베이스 소리를 입혔을 때, 완전히 새로운 것이 탄생했다. 음악의 세계에서 이와 같은 성과는 다시없을 것이다. 저 멀리 자메이카에서는 싱코페이션3)이 들어가 흥겨운 스카 리듬이 다운 비트 위에 풍부한 음조를 덧붙이는 변화가 일어났다.(둥-칙-치카-칙-둥) 레게가 탄생한 것이다. 콩가를 연주하던 사람들은 갑작스레 전 세계에서 재즈나 소울을 연주할 때 필수적인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고풍스런 2/4 박자의 리듬보다는 1박을 강조하는 아프리카적인 드럼 비트가 낫다는 생각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마일즈 데이비스, 캐논볼 애덜리, 허비 행콕 그리고 도날드 버드와 같은 재즈 거목들은 “모던 재즈”를 버리고 베이스 기타와 전자 피아노 그리고 제임스 브라운 리듬을 탐닉하느라 한층 바빠졌다. 전적으로 소울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과 그가 거둔 대성공 덕분에 정말 새로운 개념의 재즈가 융합된 것이다.     

제임스 브라운이라는 폭탄은 핵폭발과 같아서, 빅뱅의 전자기적 여파처럼 그 폭발음을 지금까지도 들을 수 있다. 소울 음악은 미국 남부로의 급진적인 하강이며 스티비 원더의 “Superstition", 마빈 게이의 ”Inner city blues" 그리고 템테이션즈의 “Cloud nine"에서 그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처음에는 하나의 효과로서 시작되었던 것이 표준이 되었고, 훵크의 즉흥연주로 시작되었던 것이 1970년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흑인 예술가의 능력을 이루는 본질적인 측면이 되었다.

R&B와 Funk 댄스 음악에 기초를 둔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은 유럽에서 일본까지 전 세계의 최신 유행 디스코텍을 휩쓸었다. 점차 이러한 댄스 음악의 간소화된 형태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종국적으로는 미국의 주류를 휩쓸게 되었다. “디스코 열풍”이 쇼핑 몰과 영화와 패션과 댄스 신에 넘쳐나는 동안, 훵크 밴드들에 의해 연주되는 동화되지 않는 음악, 상업적인 레코드 제작자의 변화 압력에도 길바닥과의 연계를 유지하는 음악 - 제임스 브라운이라는 폭탄의 반향 - 의 검은 닻이 뿌리박혀 있었다. 훵크 음악은 살아남았고, 음악의 흑인적 미학은 1970년대로 알려진 인종 통합4)의 1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대중적인 랩 앨범에서 그 화려한 양식으로 재구축되어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사진 설명, 위 - 스토클리 카마이클(aka, 콰미 투레), 아래 - 제임스 브라운.

 

(2006/7/29)



1) 제임스 브라운의 유명한 곡. “Papa got a brand new bag"

 


 

2) 이 말은 박지성이 했다고도 전해지지만 원래는 멕시코의 혁명가 에밀리아노 사파타 혹은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 공산당 지도자인 돌로레스 이바루리의 말로 알려져 있다.

 


 

3) 당김음 혹은 흑인음악 4요소 중 하나로 약박에 악센트가 오는 것.

 


 

4) 빈센트는 흑인과 백인 간의 인종적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라 흑인이 아프리카적 순수성을 잃고 타락한 백인 사회로 동화되는 것이라 믿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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