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그때 그때 메모해두었어야 하는데, 오랜만에 쓰려니 영화 내용이 기억이 안 나는 불상사가......
17. 굿 셰퍼드
CIA를 다룬 영화는 많다. 하지만 이 영화처럼 제대로 다룬 영화는 드물 것 같다. 배우로서가 아닌 감독으로서 로버트 드니로의 재능을 재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는 CIA의 전설적인 방첩 요원 제임스 지저스 앵글턴을 소재로 CIA의 초기 역사를 다루고 있다. OSS에서 출발해서 영국 MI6 요원들의 도움으로 성장, 현재 미국의 패권을 수호하기 위한 첨병으로서 인권 유린과 테러도 마다하지 않는 거대 첩보조직으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 일별할 수 있는 영화다. 따라서 미국 역사나 CIA와 냉전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재미있게 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없이 지루할 수 있다. 다만 이 영화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민주적 통제에서 벗어난 첩보 기관이 어떻게 민주주의에 크나큰 해악으로 작용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존경하는 국정원장님, 이상하게 읽힌다면 오타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제임스 지저스 앵글턴을 소재로 한 것 중에는 케빈 코스트너가 나오는 3부작 미드 <더 컴퍼니>가 있다고 하는데, 아직 보지를 못해서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매우 참혹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제임스 지저스 앵글턴의 실제 모습보다는 그래도 많이 순화해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제임스 지저스 앵글턴은 어머니가 멕시코 계임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중간 이름에 멕시코 식 이름인 헤수스(지저스)가 버젓이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시 영국인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했으며, 영화의 내용처럼 조직의 논리에 침윤되어가는 지성인의 모습보다는 비열한 모사꾼에 가까웠다고 한다. 일례로 앵글턴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Deception is a state of mind and a mind of state", 편의상 번역하자면 "기만이란 심리적 상태임과 더불어 국가의 속내이다." 그리고 앵글턴은 이 모토에 매우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나저나 여기에 나오는 영국 첩보원 교수는 여러 모로 보아 아이재이아 벌린을 연상시킨다.)
(★★★★)
18. 위플래시
드라마 촬영에 자주 사용하는 알렉사 카메라와 별로 유명하지 않은 배우들과 더 유명하지 않은 감독이 저예산으로 제작했음에도 여느 블록버스터 못지 않은 장엄함과 스릴을 선사한 영화. 이 영화의 내용은 주인공 방에 붙어 있는 버디 리치의 포스터에 축약되어 있다. 정말로 버디 리치의 말임은 알 수 없으나, 버디 리치가 그랬다면 정말 소름돋는 말 "재능을 없는 놈이라면 결국 로큰롤 밴드의 스틱이나 잡아야 할 거다." (뭐야, 이 형 무서워;;;;) 뭔가 재즈에 대한 록 팬들의 열등감을 팍팍 자극하는 말이다. 사실 대중음악의 역사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과언이 아닌데, 록이야말로 뮤지션의 습성, 행태, 심지어 마약 상용부터 해서 재즈에 대한 일종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통해 성립된 장르이기 때문이다. 록 팬들이 발끈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재즈 팬들 중의 대부분은 대개 록이나 헤비 메틀로 시작해서 재즈로 취향의 전환을 이룬 사람들이라고 본다. 훵크나 소울에서 재즈 취향으로 건너온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나는 재즈에 대한 록의 열등감이 취향 전환의 가장 큰 계기라고 본다. 아닌가?
각설하고 여기에 나온 플레처 교수와 주인공 앤드류의 관계도 매우 흥미롭게 봤다. 예전에 재즈에 대해서 재즈를 민중의 음악으로 상찬하는 홉스봄보다 사도-마조히즘적 작용과 전통에 대한 맹목적 복종의 음악으로 본 아도르노가 재즈에 대해서 훨씬 정확한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아마도 아도르노가 클래식 교육으로 훈련된 귀를 가진 사람이라서일 것이라는, 이제 와서 보면 조금은 졸렬한 글을 이 블로그에 써둔 적이 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그런 견해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된다. 이 영화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개인적으로 덧붙여 두고 싶은 게 있다. 바로 여기 나오는 플레처 교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플레처 교수가 그저 단순한 새디스트적 교수법을 가진 음악 교수라기보다는 현대의 음악 산업에 대한 은유라고 본다. 오늘날 음반, 음원을 포함한 음악 산업은 아티스트들을 발굴하고 육성하기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무엇이 좋은 음악인지 아닌지를 판별해내는 일종의 판관 역할까지 떠맡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플레처 교수와 앤드류의 경우야말로 음악 산업과 일개 뮤지션 간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가지 더! 플레처 교수를 보면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마일즈 데이비스인데, 마일즈 데이비스 또한 한없이 자상할 때도 있었지만 뮤지션들을 몰아치고 닦아세움으로써 자기의 음악을 완성해나간 인물이다. 다만 플레처 교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마일즈 데이비스는 이미 최고의 뮤지션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플레처 교수처럼 다른 연주자들을 닦달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 뿐이다. 자서전에 보면 마일즈 데이비스가 존 콜트레인을 때린 일화가 나오는데, 그 이유는 "연주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 심지어 프레디 허바드의 연주에 대해서도 "들을 게 없다."고 했단다. (뭐야, 이 형도 무서워 ㅠㅠ)
(★★★★★)
19. 월 스트리트
올리버 스톤이 이번에 타리크 알리와 대담집을 냈는데, 나는 이 책이 근래에 읽은 책 중에 감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올리버 스톤은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역사가이다. 특히 아내 분이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한국의 역사에 대한 식견도 놀라울 정도다. 나는 이런 놀라움으로 올리버 스톤을 재발견하게 되었고 경제에 문외한임에도 기꺼이 영화를 봤다. 결론은 정말 올리버 스톤의 각본 중에 <스카 페이스>가 최고라고 한다면 감독한 작품 중에는 <월 스트리트>가 최고다. 이 영화는 소재 상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흥행에 실패했으나 훗날 영화팬들에게 재발견되어 컬트 클래식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내가 이 영화를 최고작으로 꼽는 이유이자 가장 흥미롭게 여겼던 부분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다. 고든 게코와 버드 폭스, 버드 폭스의 아버지 등 영화에 나오는 각각의 인물들은 산업자본이 저물고 금융자본이 융기하던 시대에서 그 시대가 지닌 각각의 부분들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이들은 단순히 성격적으로 유형화된 인물이 아니라 세계의 역사 이면에서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을 대변하는, 일종의 '세계사적 개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표층의 차원에서는 출세욕을 지닌 자신만만한 노동계급 출신의 젊은이가 야망을 펼쳐나가는 현대판 쥘리앙 소렐의 드라마를 보여주면서,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는 그 인물들의 대사와 몸짓과 행위 등을 통해 '월 스트리트'라는 우리에게도 단순한 거리의 이름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차원은 분리된 것이 아니며 정확하게 서로를 반영하며 교호작용한다.
(★★★★★)
(카메오로 출연한 감독님...귀여우심!)
20. GP506
사실 <알 포인트> 정도는 될 것이라 기대했었다. 솔직한 얘기로 이 영화를 볼 시간과 정성이면 인터넷 공게에 올라와 있는 군대 괴담을 읽는 게 훨씬 낫다. 스토리의 개연성도 부족하고 배우들의 대사들도 군대의 실제 언어생활을 반영하고 있지도 않고, GP라는 고립된 공간의 특수성과 그로 인한 병사들의 심리 상태를 잘 살린 것도 아니고 그러다보니 내부에서 발생한 사고의 원인도 전혀 궁금하지 않다. 매우 흥미로운 소재임은 틀림없으나 권하고 싶은 영화가 아니다. 나와 취향의 같은 분들의 시간을 세이브해주고 싶다.
(★★)
21. 이장호의 외인구단
앞서 공포영화의 탈을 쓴 신파극을 보았기 때문에 신파극과 정면승부하자는 생각으로 본 영화. 그러나 의외로 흥미를 끄는 요소들도 많고 음악은 더더욱 괜찮다. 특히 김도향 씨가 부른 주제가가 지금 와서는 조금 촌스럽게 들리기는 하지만 "강한 것은 아름다워~"하는 부분이 매우 흡인력 있다. 게다가 음악은 정성조 선생님이 맡았다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올댓재즈"에서 플룻과 색소폰을 번갈아 연주하시던 모습 그립습니다.) 다만 엄지, 너는 나의 성전이고 어쩌고 하는 원작의 대사가 이제 와서 보기엔 너무 중2병 돋고, 스토리도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 사실 한화 이글스와 <파울볼>의 고양 원더스 이야기야말로 정말로 제대로 된 <외인구단>의 스토리 그 자체 아니겠는가? 악랄하게 굴리는 감독님과 뺑이치는 선수들 하며.....(그러고 보니 <위플래시>도?) 그리고 영상구성도 개인적으로 볼 때는 황당한 구석도 없지 않아서 여러 모로 많은 의문이 들었다. 이장호 감독이 무슨 에이젠쉬체인이나 지가 베르토프도 아니고 이런 실험적 영상미를 가지고 한 시절의 가장 대중적인 영화감독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 관객들이 이미 선진적인 취향을 갖고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감독이 마틴 스콜세지처럼 대중영화라는 한계 속에서도 자신의 영상미학을 관철시킬 수 있을 정도의 명장이어서였을까? 내 개인적인 의견은 별로 밝히고 싶지 않다. 나도 내가 잘 했던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여기에 타이거즈 팬으로서 반가운 대목은 해태 타이거즈가 당시 스폰서 역할을 맡아서 현실 그대로 프로야구 최고의 구단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해태는 탁월한 타자 마동탁에게 계약금 2억원을 안겨주면서 스카웃해가는데 (계약금 상으로만 보면 마동탁은 선동렬보다 뛰어난 기량을 갖춘 타자다. WBC때 추신수처럼 한 7할 치나?) 이 부분이 가장 현실성이 떨어진다. 타이거즈 팬으로서 고증을 하자면 2억원 중에서 1억원은 현찰로 줬다 치고 5천만원은 홈런볼, 5천만원은 맛동산으로 주었겠지. 이 영화의 또다른 재미는 서울의 옛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사실. 존 버거는 사진과 달리, 영화는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매체라고 했는데, 이 영화에서 내가 느낀 아늑하고 아련한 감정에 대해서는 과연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