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카메라를 든 사나이
1928년, 소련에서 지가 베르토프가 찍은 영화. 혁명 이후 러시아의 일상과 사람들의 다채로운 모습을 다룬 시네마 베리테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 영화나 영상 교재에 빠짐없이 언급되고, 워낙 유명하기도 하지만 일반 영화 팬들이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920년대에 현재 쓰고 있는 모든 영상 기법들이 총동원된, 아니 어쩌면 그 시원이 될 영화가 나왔다는 점이 흥미롭다. 지가 베르토프는 수동 카메라가 돌아가는 의성어 '지가'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며, 글을 모르는 러시아 민중들이 쉽게 영화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베르토프의 아이디어와 영상 기법들을 잘 계승해 활용한 곳이 자본주의의 꽃인 MTV라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3. 구니스
이 영화를 보기에는 너무 늙어버렸다. 분명히 15세가 넘기 전에 봤으면 재미있었을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 주인공 또래의 소년소녀들이 무엇에 열광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영리한 계산이 엿보인다. 캐릭터 구성도 여러 전대물 등에서 반복되어 온 것이며, 플롯 또한 익숙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악당은 적당히 평면적이고 적당히 멍청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류의 모험물은 제국의 소산이 아닐까 싶다. 자라나는 제국의 소년소녀들이 야망을 갖고 모험을 지향하도록 매우 재미있지만 또한 정교하게 계산되어 장차 제국의 지주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모험물의 목적이 아닐까? 우리 군담소설을 보면 외부가 없다. 우리 자신이 외부이므로 대개 입신출세를 거듭하면서 그 출세가 완료되는 곳인 중원을 지향한다. MLB를 꿈꾸는 야구선수처럼. 이와 반대로 서구의 모험물들은 항상 외부를 지향하며 토착 세력은 그 겉림돌이 되어버린다.
14. 뉴 잭 시티
네이버 영화 평점에서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크게 갈리는 편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흑인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고, 일반적인 영화 팬의 입장에서 보면 또 그저 그런 영화로 보일 수 있다. 소울, 훵크 팬으로서 보기에 이 영화는 '흑인 엔터테인먼트의 총화'같다. 느와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고 계몽적 성격을 띤 액션 영화이면서 사소한 배역으로 등장하는 그 시절 R&B, 힙합 아티스트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연인 (이제는 원로) 래퍼 아이스 - T는 물론, 업타운 레이블의 R&B 스타 크리스토퍼 윌리엄스가 '캐시 머니 브라더스' 갱단의 브레인 카림 악바르로 출연했다. 게다가 테디 라일리의 가이, 트루프, 레버트는 물론 퍼블릭 에너미의 플레이버 플레이브, 키스 스웨트, 거기에 마약상에 빌붙어 사는 타락한 목사로 애쉬포드 앤드 심슨의 닉 애쉬포드까지 NBA 스타 빼고 당시 유명한 뮤지션들이 이 영화에 한 장면씩 얼굴을 비추고 있다. 초반에는 엄청난 재미를 선사하던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을 사실이다. 감독 마리오 밴 피블스는 <스카페이스>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겠지만 역량이 부족했다. 대신 웨슬리 스나입스의 열연이 '니노 브라운'이라는 매력적인 악역을 창조해냈다. 훗날 등장한 갱스터 래퍼들도 '캐시 머니'니 '영 니노'니 하는 이름을 내세운 것을 보면. 아무리 그래도 '니노 막시무스 카이저 소제'의 니노는 이 니노가 아니겠지.
15. 블랙 호크 다운
우리가 순수 예술에서 오락성을 기대하지 않듯이, 오락물에서 예술성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미국만세물'에게서 또한 미국 만세가 나오지 않으리라고 기대해서도 안 될 것이다. 리들리 스코트 감독은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 이름을 다 외우지도 못했으면서 걸작 전쟁물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미국 자본으로 미 육군의 지원을 받고, 레인저 부대와 델타 포스 부대에서 배우들이 훈련을 받고, 출연한 배우들조차 영화인지 전쟁인지 모를 정도로 몰아간 전쟁물이다. 여기서 전투의 사실성을 논할지언정, 미국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있다거나 하는 비판은 소용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미군은 절대 전우를 전장에 버려두지 않는다는, 특히 다민족, 다문화로 구성된 미군이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집착하는 일종의 신념이 이 영화에도 매우 잘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누군가 리들리 스코트 감독이 영국인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절대 미국 찬양물이 될 수 없다고 써놓은 글을 봤는데, 사람의 신념이란 국적과 무관한 것이다. 저 길바닥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박사모를 봤다면 말이다.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성공은 오히려 그가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가치를 잘 구현하는 감독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16. 한밤의 암살자
소위 알랭 들롱의 사망유희 시리즈 중 하나. 알랭 들롱이 주인공으로 나와 비운의 죽음을 맞는 영화들을 장난 삼아 통칭해서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이 영화는 짐 자무쉬의 <고스트 독>은 물론, <첩혈쌍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한때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의 하나였다. 대사 없이 이어지는 영상들은 더할 나위 없이 시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갱스터 느와르면서도 화면 중간 중간의 여백들은 잠시 생각할 여유마저 주었다. 사실 영상 편집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객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초심자를 제외하고는 대개 호흡이 빠른 편집을 선호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야만이 수용자에 대한 불안을 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호흡을 자유자재로 늘였다 줄였다 하는 편집은 마치 농구에서 불규칙 드리블과 같이 기술적으로 완성된 사람들만이 선보일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면에서 장 피에르 멜빌은 최고였다고 본다. 여기서 과거형을 쓴 이유는 스타일리쉬한 장면을 선호했지만 이제는 좀 더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런 부분에 매력을 덜 느끼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영화는 멜빌의 보수적 세계관과 더불어 심미적 형식 속에 허무주의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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