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Steve Arrington 인터뷰 - 1

Baron Samdi 2017. 5. 11. 11:19

Steve Arrington이 이 나라에서 얼마나 알려져 있고, 또 얼마나 인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끓어오르는 팬심으로 번역해봤습니다.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기괴한 것에 끌리는 허영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스티브 애링턴 정도면 본토며 유럽에서도 훵크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고, 그의 구술은 훵크의 역사상 위대한 밴드 중 하나인 Slave와 당시 오하이오 훵크 신이 어땠는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훵크의 발전에서 지역 밴드간의 경쟁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흑인음악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요소였던 보컬이 시장의 요구에 따라 독립하게 된 이후로 밴드의 위상은 보컬의 백업 세션 정도로 격하되는 듯 합니다. 힙합에서 MC들만이 강조되는 풍토도 그렇고 말입니다. 여전히 밴드 중심인 록 신과는 다른 흐름인 것 같습니다. 이게 훵크의 발전인지, 변화인지, 타락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힘든 문제입니다. 앞으로 훵크에 대해 좀 더 알게 되면 여기에 대한 제 견해를 정리해볼 생각합니다. 드리는 말씀이 길었는데, 슬레이브/ 스티브 애링턴의 팬들은 물론이고, 근자에 발매된 <Pure Thang>이나 Dam Funk와의 콜라보 때문에 새로이 알게 되신 분들, 그리고 대중음악의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께 감히 일독을 권합니다. 항상 강조하지만 직독직역의 허술한 방식으로 다수의 오역이 있을 수는 있으나 원문 보시는 것보다는 나으시리라 믿고 올립니다. 읽어주시고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 Baron Sam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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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코스트 G - 훵크의 진정한 개척자 중의 하나이며, 현재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 거주 중인 스티브 애링턴이 2013년 레드 불 뮤직 아카데미에서 긴 음악 경력과 그동안 기여해온 바를 설명하기 위해 자리했다. 그의 혁신적인 보컬과 드럼은 전설적인 소울/훵크 밴드인 슬레이브와 함께 발표한 "Watching You"나 "Just A Touch Of Love"와 같은 클래식, "Weak At The Knees", "Nobody Can Be You" 같은 솔로 곡에 알맞은 것이었다. 그의 곡들은 제이-지, 스눕, N.W.A, 머라이어 캐리 같은 이들에게 샘플링되었으며, 전세계의 센스 있는 클럽에서 울려 퍼졌다. 90년대의 긴 휴식기를 지나 스티브는 스톤 스로우 레코드의 댐 훵크와 함께 콜래보레이션 앨범을 발표함으로써 인생의 새 장을 활짝 열어젖혔다.

질문자: 오늘 훵크 음악의 전설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모실 분은 슬레이브라는 밴드에서 드럼으로 시작하셨고 나중에 보컬리스트가 되어 활동하셨습니다. 솔로로서도 엄청난 양의 훌륭한 음악을 발표하셨으며 본인의 밴드인 '홀 오브 페임'(Hall Of Fame)을 이끌었죠. 여러분, 스티브 애링턴 씨를 위해 큰 박수 한 번 부탁드립니다.

(박수)

오하이오 주 데이튼 시에서 오셨습니다.

스티브 애링턴 (이하, 애링턴): 바로 맞췄어요. 훵크의 고장이죠.

(웃음)

질문자: 딱 그 말씀이 맞네요. 훵크의 고장.

당시 거기가 훵크 뮤직의 요람이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 얘기를 좀 더 나눠보자면, 데이튼은 큰 도시도 아니었지만 몇몇 엄청난 밴드들을 양산해냈습니다.

애링턴: 매우 작은 도시였지만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은 동네였어요. 오하이오 플레이어즈가 이 동네서 시작했고 히트웨이브, 슬레이브, 페이즈-오, 데이튼, 밴드 데이튼 말예요, 레이크사이드 같은 이들이 있었죠. 말하자면 끝도 없어요. 우리 모두에게 큰 영향을 준 오하이오 플레이어즈가 나온 데라면 뭐 설명 끝 아닙니까. 그 사람들은 정말 독창적이었어요.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생각하곤 했죠. "오하이오 플레이어즈처럼 되고 싶다." 그 사람들 같은 음악을 하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사람들처럼 독창적이고 싶었단 얘깁니다. 그래서 데이튼의 음악은 모타운과 다릅니다. 프로듀서가 주도하는 음악이 아니라는 말이죠. 프린스 같은 아티스트들이 나왔던 미네아폴리스와도 달라요. 미네아폴리스의 음악은 그 음악 만의 특정한 색채가 있어요. 데이튼 사람들은 그런 색채가 있으면서도 우리 것만을 해왔고 독창성이라고 할 만한 스타일을 발전시켰습니다.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특징이었죠.

질문자: 그럼, 데이튼 시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화적으로요. 어떤 영향이 있으셨는지요.

애링턴: 모르겠어요. 비행기의 고장이기도 했고요. 라이트 형제가 데이튼 출신입니다. 폴 로렌스 던바( 미국의 시인 겸 소설가 - 옮긴이)도 그렇고요. 독창성과 독특한 사고의 고장입니다. 작은 마을이고 별볼일 없는 동네이긴 했지만요. 훵크는 흘러 넘쳤어요. 트라우트먼, 데이튼, 잽 아시죠? 다 데이튼에서 나왔어요. 데이튼과 신시내티요.

질문자: 그럼 당시 거기는 정말로 경쟁이 일어날 만한 곳이 생겨나고 있었나요?

애링턴: 뭐, 아마추어 경연 대회와 밴드 경진대회가 있었죠. 우리도 참여했었어요. 고등학교에서는 길모퉁이를 따라 줄들이 늘어섰는데, 그때 참여한 밴드들이 다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밴드가 되었죠. 아시다시피 레이크사이드가 기억나고요. 또 오하이오 플레이어즈가 제일 첫째였고 우리는 아마 그 사람들보다 10년 정도 아래였어요. 7년에서 10년 정도 아래 연배죠. 그래서 레이크사이드가 우리 또래 밴드 중에 최고였고, 우리가 자라나는 새싹들이었고요. 그 친구들은 '영 언더그라운드'(the Young Underground)라는 이름을 썼어요. 레이크사이드가 우승할 것 같았기 때문에 모든 밴드들이 2위를 놓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 친구들이 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대단한 일들을 해냈죠. 그 밴드는 흥미롭게도 지역 밴드로서도 뭔가 보여줄 것 같더니 전국 무대로 진출하면서 제대로 보여줬어요. 다른 몇몇 밴드들은 여러 다른 그룹에서 각기 모인 사람들로 이합집산을 하면서 전국적인 레벨로 올라가게 되는 데요. 하지만 레이크사이드는 영 언더그라운드 시절과 거의 같은 멤버들로 지역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밴드로 성장해나간 겁니다.  

질문자: 그 당시 밴드들의 경쟁 무대에 올랐을 때, 선생님 멤버들의 나이는 다들 어땠습니까?

애링턴: 뭐, 15세에서 18세까지였습니다.

질문자: 더 옛날로 돌아가서, 개인적으로 훵크 음악을 알게 된게 언제입니까?

애링턴: 제임스 브라운을 들으면서부터요. 두 말하면 잔소리죠. 제임스 브라운의 "Cold Sweat"이었습니다. (제임스 브라운의 71년작 - 옮긴이) 제가 드럼을 시작했을 때처럼, 드럼을 칠 때는 저마다의 "Cold Sweat" 비트가 있어야 합니다. 정말 그래야 해요. 자기만의 "차가움 cold"이 없다면 "됐습니다. 다음 분!"이라고 말할 수 밖에요. 누가 와서 제 앞에서 오디션을 본다면 이렇게 물을 겁니다. "당신의 'Cold Sweat' 비트는 어떤 것입니까?" 당신만의 아치 벨 앤드 더 드렐스 비트도 있어야 하고 당신만의 슬라이 스톤도 있어야 합니다. "Sex Machine"같은 거요. 당신이 드러머라면 이런 비트들을 만들어낼 줄 알아야죠. 제가 드럼을 시작했을 때, 이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었어요. 다른 어떤 비트가 더 필요한 것인가? 게다가 두왑(남성 중창단이 이끄는 R&B 스타일 - 옮긴이)의 시대는 정말 강력했어요. ("Betcha by Golly, Wow"를 부르며) 이런 노래들이 있었죠. ("Cowboy to Girls"를 부르며) 그래요. 두왑 그루브도 할 줄 알아야 해요. 보컬 그룹 뒤에서 연주도 해야 하잖아요. 자기들이 연주도 하고 노래도 부르는 (원문은 self-contained bands - 옮긴이) 자족적인 밴드들이 뜨기 전에는 보컬 그룹들이 여전히 활동 중이었어요. 연주도 하고 노래도 하는 밴드들이 뜨기 시작하니까 보컬만 중시하던 두왑 그룹들은 시들해지기 시작했죠. 제임스 브라운은 그 이전의 다른 프로듀싱 스타일과는 방향을 달리 해서 자족적인 이런 밴드들 중에서 리듬 섹션을 아주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을 무렵에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지요. 그리고 갑자기 록 음악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어요. 딥 퍼플이니, 레드 제플린 같은 밴드들 말예요. 우리는 그 밴드들로부터도 영향을 받기 시작했어요. 저같은 경우도 부분적으로는 예스 같은 밴드에게서 영향을 받았어요. 그러다보니 제가 음악 경력을 시작할 무렵에 뜨고 있던 것들이 이런 것들이었죠.

질문자: 그렇습니다. 장르들과 성격이 다른 음악들이 교차하던 위대한 시기였던 것 같네요.

애링턴: 그렇죠. 그렇다마다요. 저도 이런 음악들에 완전히 빠져들었어요. 다 찾아들어보고 아주 미쳤었죠. 콘서트도 다 가봤습니다. 돈을 댈 만한 형편은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 당시 콘서트는 다 4에서 7달러 정도면 입장 가능이었어요. 요즘하고는 다르죠. 그치만.

질문자: 처음 가보셨던 콘서트는 기억하십니까?

애링턴: 글쎄요. 첫 콘서트라... 저희 선생님께서 캔드 힛과 존 리 후커 콘서트에 데려가 주셨어요. 7학년때 미술 선생님인데, 히피셨던 것 같아요. 저는 당시에 시를 썼었는데, 우리는 금요일 같은 날 학교에 음악을 가져와 함께 들었어요. 아시다시피 잭슨5 음반도 가져와 들었었고요. 제가 잭슨5를 가져왔는데요. 그러면서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도 가져왔고요. 레드 제플린도 가져왔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딱 알아보시더라고요. 제가 제 생각에도 학교에 음악을 가져오던 다른 친구들보다 좀 더 음악을 듣는 범위가 넓구나, 이렇게요. 그러니 선생님이 물어보십디다. "위튼버그 대학에서 열리는 캔디드 힛과 존 리 후커 콘서트가 열린다는데, 혹시 관심있니?" 그래서 그랬죠. "네에에!" 그래서 그게 제 첫번째 콘서트가 되었습니다. 7학년 때요. 저는 데이튼 시에 있는 레이크뷰 팔라디엄 같은 데서 연주자로 공연에 서기도 했는데요. 소울 일루전스니 엘루더스니 하는 밴드들에서 드럼을 치면서요. 거기서 스파이더 터너, 엘마 프랭클린, 이 사람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언니인데요. 그리고 조 텍스같은 사람들의 오프닝을 맡았죠. 몇몇 공연에 직접 서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진짜로 가본, 진짜 첫 콘서트는 캔디드 힛과 존 리 후커입니다.  

질문자: 그러면 정말 어린 나이서부터 연주를 하셨네요.

애링턴: 그렇습니다. 우리 형 밴드였어요. 이름하여 소울앵거스라고 거기서 콩가와 봉고를 맡았었죠.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다 음악뿐입니다. 그때 기억은 제가 살아있는 한 거의 다 기억날 거예요.

질문자: 정말 음악적인 가정에서 성장하셨네요.

애링턴: 맞아요. 우리 형은 색소폰을 불었고 어머니는 음악 애호가셨고요. 아시다시피 토요일이면 온 가족이 집안 청소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머니는 몽고 산타마리아를 트셨어요. 레이 바레토도 트시고, 재즈도 많이 트시고 모타운 노래도 많이 트셨죠. 어머니가 아레사 프랭클린의 초기 발표작들을 좋아하셔서 아레사 프랭클린 음반도 집에서 정말 많이 트셨어요.  

질문자: 라틴음악의 세례도 많이 받으셨군요. 댁에서.

애링턴: 물론이죠, 물론이죠.

질문자: 그렇다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말씀을 들어보기로 하는 게 나을 듯 합니다. 선생님께서 L.A로 가셔서......

애링턴: 그래요. 근데, 실제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 데가 샌 프란시스코와 베이 에이리어 지역이었어요. 제겐 그랬죠. 데이튼 시는 뮤지션들 입장에서는 훌륭한 곳이기는 한데 거기서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었어요. 데이튼 안에서 음악을 갈고 닦는다거나 스튜디오에 가서 뮤직 비즈니스에 뛰어든다든가 하는 일요.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서부 지역으로 나가게 된 겁니다. 레이크사이드는 L.A로 갔고, 저는 베이 에이리어, 샌 프란시스코 쪽으로 갔죠. 거기서 코크 에스코베도(미국 라틴 재즈의 거장 - 옮긴이)를 만났는데 이 대목이 재미있습니다. 제 친구랑 제가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분위기를 익히고 있었어요. 그 동네서 지낸 지 한달 반째였는데요. 차를 몰고 돌아다니다가 친구가 갑자기 "야! 저기 잔디밭에 물주고 있는 사람 코크 에스코베도야.", 그래서 "야, 임마 아니야. 산타나 밴드에서 퍼커션 치는 사람 아니야? 말도 안 돼." "아, 맞다니까!" 그래서 제가 그쪽으로 가서 물어봤어요. "저기요. 제가 오하이오에서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러는데요. 폐를 끼치려는 건 아니고 선배님 음악을 좋아합니다. 저도 여기서 뭐 좀 해보려는데요. 오디션 좀 볼 수 있습니까? 드러머 필요하신 분 계시면요. 여기 제 전화번호인데요." 그 사람이 심드렁하게 이렇게 되받았어요. "뭐 좋아요. 마침 친구 하나가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 친구라는 사람은.......뭐였더라. 플루트 연주자래요. 그가 그러더군요. "좋아요. 이리 와 보슈. 오디션 한 번 받아봅시다." 코크의 집에 가서 오디션도 받고 함께 연주도 하는데, 코크가 그래요. "너랑 연주를 해보니 감이 딱 온다. 우리 밴드에서 드럼 쳐보고 싶은 생각 없니?" 겨우 어찌저찌하다가 이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 거죠. 코크 에스코베도가 소개해 준 그 플루트하는 친구와 연주를 하고나서는 코크와 함께 일했습니다. 결국 그 형님 집에서 하숙을 했고 그 형님이 저를 키워주기로 하면서 살사니 라틴 재즈니 하는 것들을 알려줬어요. 무슨 말이냐면. 그 형님 말씀이요. "이 음계를 연주할 수 있다고는 해도 음악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해." 그게 그 형님이 제게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음악이 하는 말. 그 말을 알고나서야 다른 스타일의 음악에 적용할 수 있었죠. 그것은 그저 계이름 정도가 아니었어요. 그거보다더 더 깊은 것이었죠.

질문자: 그러면 당시 코크 에스코베도의 콘서트는 어땠습니까?

애링턴: 뭐, 그게, 제가 당시 라틴 소울 같은 음악을 하던 첫 세대의 인물들 중 하나였는데요. 코크의 앨범 <Comin' At Ya!>랑 셀프 타이틀 앨범 <Coke>랑 어마어마한 훵키 라틴 소울 곡들였죠. 쉴라 에스코베도 (일명 Sheila E. 코크 에스코베도의 조카딸이자 미국의 가수 겸 배우 겸 작가, 조지 듀크의 드러머로도 유명하다. - 옮긴이)도 만났는데, 와서는 저희들 곁에 앉았는데 코크가 와서 그럽디다. "우리 조카딸 좀 봐줘. 얘도 퍼커션 치거든." 그래서 "네? 여자 퍼커셔니스트라고요? 그런 건 생전 처음 들어보는데." 그리고 물어봤어요. "몇 살이나 됐어요?." 그러니 "18, 아니 19살은 되었던가?" "아 좋아요." 그래서 둘이 만났는데 뭐 앉자마자 포스가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거의 이랬어요. "얘 뭐야?" 그러니까 걔가 담배를 폈거든요. 19살짜리가. 첫 인상부터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그때 여자 퍼커셔니스트는 처음 봤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친해졌고 그 다음에는 같이 연주하게 되었어요. 쉴라와 쉴라 아버지 피트랑요. 그런데 그 음악이 좋았어요. 왜냐하면 소울풀하면서도 뭐랄까 당시 중서부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요소가 있었거든요. 왜냐하면 중서부 지역에서는 산타나나 몇몇 재즈 음악들은 인기가 있었지만 살사나 라틴 소울같은 것은 없었거든요.

질문자: 그러면 대충 비슷한 시기에 슬레이브가 결성되었네요.

애링턴: 맞아요. 77년에요.

질문자: 그러면 초기에는 참여하신 게 아니네요.

애링턴: 네 아니죠. 그 친구들은 이미 제가 합류하기 전에 앨범 2장을 낸 상태였어요. 하지만 슬레이브 멤버의 절반이 영 미스틱스라는 이름의 지역 밴드로 저와 함께 했었거든요. 제가 그 친구들보다 4살 가량 나이가 많았고요. 우리 모두가 학교를 함께 다녔어요. 하지만 저는 젊은 애들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어요. 슬레이브의 절반은 30대였던 반면에 또 16살, 17살 가량의 멤버들이 있었어요. 저는 딱 그 중간이었고요. 제가 18살 때쯤인가 마크 애덤스가 베이스를 쳤고 마크 '드랙' 힉스가 기타를 쳤고 대니 웹스터도 기타였는데 이 친구들 모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는 친구들이었어요. 저는 그 친구들보다 좀 나이가 많았고요. 그런데 그 친구들은 제가 캘리포니아에서 에스코베도와 함께 하는 동안 "Slide" (슬레이브의 첫 히트 곡 - 옮긴이)라는 히트곡을 냈어요. 그때 제가 "이야, 'Slide' 이거 정말 좋네."하면서 고향에 내려가 그 앨범을 가져왔어요. 제 고향 친구들은 여전했어요. 저도 이런 마음이 들대요. "야, 이 친구들 이제 시작이로구나." 저는 정말 행복했고 그 친구들 덕에 마음이 벅찼어요.

질문자: 그럼 어쩐 일로 다시 오하이오에 내려가서 슬레이브와 함께 하게 되신 건가요?

애링턴: 글쎄, 피트와 쉴라 에스코베도와 투어를 돌고 있다가 투어가 끝났어요. 슬레이브 친구들이 드럼 쪽에 변화를 주고 싶다고 하대요. 마크 애덤스가 저한테 전화를 걸어왔어요. "형, 우리가 드럼을 바꾸려고 하는데. 오하이오에 다시 와서 우리 밴드 같이 해보자." 저는 "진짜 좋지!" 당시에 투어를 끝나고서 다음에는 뭐를 해야 되나 살피고 있던 찰나였거든요. 그래서 오하이오로 돌아와서 그 친구들 일에 드럼으로 참여하면서 낸 게 "Stellar Fungk"였어요.

질문자: 지금 한 번 들어볼 수 있겠네요.

(음악과 박수)

혹시 이 곡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일이 있으신가요?

애링튼: 거 보슈. 이 정도는 돼야 훵크지.

(웃음)

제 말은 뭐 아시겠지만 우리가 데이튼에서 왔고요. 같은 고등학교에서 컸다는 거에요. 우리는 꿈이 많았어요. 그 꿈을 이루려고 했고요. 그리고 고향 친구들과 음악을 함께 했고 아주 제대로 된 heavyweight 훵크를 연주했어요. 제가 볼 때 그런 훵크는 말이죠. 애틀랜틱 스튜디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네요. 스튜디오 A에 설치된 아주 큰 스피커에서 믹싱을 마치고 우리 연주를 다시 들으면서 이랬었어요. "아 이거 진짜 잘 만든 훵크네." 그저 짜릿한 기분이었어요. 지금도 그때 음악을 들어보면 처음 들었을 때와 같은 마음입니다. 물론 그 앨범이 드러머로서 제 첫 데뷔 녹음이었고 저나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끝~내주는 stell-ar 놈들이야"하는 생각이 들었죠. 저도 그런 놈 중 하나였어요. 이 노래가 제 보컬 데뷔곡이었고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30년 뒤에 다시 들어봐도, 실제로는 거의 33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처음 들었을 때처럼 감동적이고 마음이 벅차요.

질문자: 그러면 <The Concept>앨범에서도 몇 곡 직접 부르셨죠?

애링턴: 네, 대부분 백그라운드 보컬였죠. 리드로 한 거는 "Coming Soon"이란 곡이고.

질문자: 그러면 그 전에는 노래를 해보신 경력이 있으셨나요?

애링턴: 바 같은 데서 활동하던 머피스라는 밴드에 있을 때 불러봤어요. 그 전에 데이튼에서는 드러머였고요. 보컬로는 알려진 적이 없었고 저도 보컬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고요. 그런데 혼자 부를 때나 아주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 앞에서는 불렀지만, 당시 그 바닥에서는 제가 노래를 하는지 다들 몰랐어요. 그래서 머피스라는 밴드에 들어갔을 때, 그 친구들은 바 같은 데를 돌면서 연주하던 친구였는데 나중에 라스 베가스 같은 데서 연주할 것을 염두에 두고서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백인 취향의 올드팝 - 옮긴이)같은 노래를 불렀죠. 그러니까 모든 공연에서요.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니 저는 독특한 성격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고 독특한 보컬 스타일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슬레이브에 들어갔을 때, 슬레이브 친구들이 "형, 노래할 수 있어?" 그래서 제가 "그럼, 내가 좀 하지, 임마." 그랬죠. 그 다음에는 본격적인 보컬로 행세하기 보다는 그래도 보컬을 하는 연주자로서 스타일을 발전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 보컬 스타일이 좀 독특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질문자: 그러면 선생님 보컬 스타일에 영향을 준 사람들은 누가 있습니까?

애링턴: 존 콜트레인의 연주 방식을 목소리로 모방한 게 첫 번째고요. 마일즈 데이비스가 트럼펫을 다루는 것도 따라해봤고, 그리고 몇몇 보컬리스트들도 있는데요. 스티비 원더는 당연하고, 슬라이 스톤도 그렇고. 네 예스의 존 앤더슨이 있네요. 그렇지만 대부분 저는 그저 악기음을 따라했어요.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 솔로라든지. 저는 그런 솔로 연주들을 목소리로 따라했어요. 그런 것을 하는 보컬이 되겠다 생각한 게 아니고요. 그냥 좋아하는 것에 빠져들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계속 그렇게 해나가다보면 마음에 드는 솔로 연주가 있어요. 그러면 또 음표 하나하나 따라하려고 해보고 배우는 거죠. 노래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고 그런 관점에서 더 노래에 접근했던 겁니다.

질문자: 그러면 다음 슬레이브 앨범에서 선생님은 숫제 리드 싱어로 나서셨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애링턴: 뭐, 그러니까, 친구들이 알게 된 거죠. 그래서 "믹싱한 데다 애링턴의 목소리를 얹어보자"고 하게 된 거고요. 우리가 스튜디오에서 "Just A Touch Of Love" 곡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곡이 다 만들어지고 백그라운드 보컬 트랙도 완성이 됐어요. 그런데 리드 보컬 트랙은 완성이 안 되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돌아가면서 노래를 했죠. 슬레이브는 템테이션즈 같은 밴드처럼 "Slide"를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세 명이 돌아가며 보컬을 맡았거든요. 그런 게 항상 일장일단이 있는 겁니다. 모든 멤버들이 마이크 앞으로 가서 순번을 돌아가면서 "Just A Touch Of Love"를 불러봤는데 영 신통치가 않았어요. 그래서 멤버들이 "스티브, 저리 가서 노래 좀 해봐." 그러대요. 그래서 제가 "어 좋지!"하고 (노래를 허밍으로 부르며) 가사도 없었어요. (허밍을 계속하며) 막 이렇게 하니까 "이야, 노래 진짜 죽이는데, 그렇게 해볼까?" 그래서 가사를 얹어봤죠. 이렇게요. "호텔로 돌아가요~" 그러고나서 생각나는대로 불렀죠. "그저 사랑의 손길로~" 그러니까 지미 더글러스 (미국의 전설적인 레코딩 엔지니어 겸 프로듀서, 그래미 수상자 - 옮긴이)가 "인터벌이 희한하게 들어가네. 좀 특이한데. 이 친구 독특한 거 같아." 우리는 모두 다 그 다음에 어찌해야 할 지 몰랐거든요. 그쪽 사람들이 "느낌이 딱 오는데. 그런데 특이하네." 이런 반응이어서요. 그래도 우리는 계속 그렇게 가기로 했고 하나님 은혜 덕분인지(목사임을 감안하여 관용어를 기독교적 표현으로 수정 - 옮긴이) 더글러스도 그렇게 작업해줬어요. 그러다보니 가수가 된 거 같네요.

질문자: 그러면 이 대목에서 그 곡을 들어봅시다.

(Just A Touch Of Love가 흐르고, 박수)

그러면 이 곡이 나왔을 때 반응들이 다들 어땠습니까?

애링턴: 아, 사람들이 좋아해줬죠. 사람들이 이 곡을 참 좋아했어요. 요즘에도 저희 밴드가 연주를 할 때면 사람들이 따라불러요. 젊은 친구도 그렇고 우리 또래들도요. 모르겠어요. 그저 하나님의 은총 같습니다. 저는 이 곡에서 드럼도 쳤는데, 이 연주가 제가 이제껏 한 최고의 연주 중의 하나입니다. 이 드럼소리를 들을 때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 하나님의 선하심이라."

(웃음)

빼도 박도 못하게 빠져든 거죠. 이제 저는 음악 팬이면서 음악의 팬이에요. 음악을 들으면 저는 아티스트로서 듣지 않습니다. 그저 일개 팬으로서 듣습니다. 그러면 제 곡이든 아니든 감동을 받아요. 감동을 받는다고요. 음악을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해요. "이게 내가 음악으로부터 얻은 것이로구나. 음악으로부터 얻은 것이야." 제 삶과 음악이 이런 식입니다. 마일즈 데이비스를 들을 때나 프린스를 들을 때 아무런 차이점을 못 느껴요. 그저 감동 뿐입니다. 제가 음악을 들을 때면 그 일부가 된 느낌입니다. 음악은 다 같은 거예요.

질문자: 그래서 슬레이브에서 보컬 겸 드러머로 겸업까지 하신 거네요.  

애링턴: 그럼요.

질문자: 그러면 라이브에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애링턴: 글쎄요. 한동안 연주하면서 노래도 했죠. 버디 마일스처럼요. 그리고 멤버들이 저를 앞에다 세웠고요. 하지만 또 계속 녹음할 때는 드럼도 쳤죠. 페이즈-오의 드러머 로저 파커가 제 친한 친구인데 제가 그 친구를 밴드에 끌어오자는 아이디어를 내서 라이브에서는 그 친구가 연주를 하게 됐죠. 결국 그 친구는 실제로 나중에 제가 제 음악을 하려고 밴드를 나왔을 때 저와 계속 연주를 하게 됐어요. 제가 앞에서 노래할 때도 대부분 녹음 시에는 제가 연주를 했지만요.

질문자: 그러면, 드러머로 연주할 때와 가수로 노래할 때 청중들의 반응이 다르다는 게 보이셨나요?

애링턴: 아뇨. 그래도 저를 데이튼에 있을 때부터 알던 사람들은 아주 놀랐죠. 다들 이랬어요. "누가 보컬이라고?", "스티브 애링턴이래.", "뭐 애링턴이 노래를 한다고?", 그래 임마, 근데 목소리가 좀 유별나지 않냐? 안 그래?", "그렇네, 뜻 밖이야." 저도 같은 마음이었어요. "나도 뜻 밖이야." 그래도 계속 했어요. "봐라, 자식들아. 내가 노래를 한다고." 웃기는 일이기는 한데, 왜냐하면 저는 무대를 어떻게 휘어잡아야 하는 지도 몰랐고 아무 것도 몰랐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갑니까? 저는 그때 이랬어요. "좋아. 우리 밴드는 지금 갭 밴드와 함께 쇼를 하고 있는 거야. 쿨 앤드 더 갱이랑 쇼를 하고 있다고" 이러면서 "좋아, 제이티 (쿨 앤드 더 갱의 보컬 제임스 워렌 '제이티' 테일러 - 옮긴이)가 앞으로 나와서 이렇게 여자들을 홀리겠지? 좋아, 나라고 못할 건 또 뭐야?" 이렇게 했어요. 저는 당시는 몰랐어요. 하면서 배운 거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슬레이브 멤버들이 저를 사랑해줬고 이렇게 말해줬어요. "애링턴, 가서 해치우라고!"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저는 프론트 맨이 되는 법을 배운 거예요. 무슨 말이냐면 저는 그런 걸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저는 항상 뒤에만 서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만족하고 있던 사람이에요. 가수가 되려는 야망도 없었고, 프론트 맨이든 뭐든 그런 욕심이 없었어요. 그저 하나님께서 시켜주신 거예요. 이렇게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네요. 진짭니다. 하나님께서 시켜주신 일예요. 저는 따르기만 했고.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가고 청중들을 다루는 법, 보컬로서 모든 것을 배워나갔습니다. 제가 참조했던 모든 다른 가수들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쿨 앤드 더 갱의 제이티도 그렇고 갭 밴드의 찰리 윌슨 등 무대 장악 능력을 가르쳐 준 다른 모든 가수들도요. 미친 짓이었지만 사람들은 저를 사랑해줬어요.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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