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Kashif 인터뷰 - 1

Baron Samdi 2016. 9. 28. 14:44

지난 925일 카쉬프가 사망했습니다. 모던 R&B의 비조, 소울을 현대화시킨 인물이라고 공식화된 표현을 사용하면 좀 딱딱한 설명이 되겠죠? 저는 그저 누군가 ‘R&B 음악이라고 하면 , 그거!’하고 떠오르는, 바로 그런 스타일을 만든 사람 중에 한 명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좀 늦게 발견되었다는데, 사인은 그저 자연사라고 합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고인의 사진과 기사가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득 예전처럼 인터뷰를 좀 번역해서 올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실행에 옮겨 봤습니다. 저도 카쉬프의 히트 음반들, 그래봤자 대표작 3장만 소장하고 있고, 이런 사람이다 정도만 어렴풋이 알 뿐, 그 이상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소울과 훵크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보니, 이 분의 개인적 이력을 통해서 일렉트로 훵크나 모던 R&B의 등장 배경을 유추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됐던 우리 소울 팬들은 족보를 잘 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회사 일 중 틈틈이 하다 보니 길지 않은 분량인데도 2회로 나누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게다가 영어 실력이 탁월한 사람도 아니고 회사 상사 눈치 보면서 하는 직독 직해 번역이라 아쉬운 감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문으로 보시는 것보다는 편하실 겁니다. 소울이나 훵크, 음악과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Kashif 인터뷰 

 

 

전자음악을 가미한 훵크 스타일로 80년대 초반 현대 R&B 사운드를 정립한 혁신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전의 이름은 마이클 존스였던 사람. 이 카쉬프 Kashif를 키워낸 것은 뉴욕 시의 복지 체계였다. 8곳의 위탁보호 가정 (보호자를 잃은 아이를 대신 양육해주는 가정)을 전전하던 그의 유일하고도 변함없는 관심사는 음악이었다. 7살 나이에 얻은 3달러짜리 플루트가 그의 열정에 불을 지폈던 것이다.

 

15살 때, 훵크 밴드 B.T 익스프레스에 보컬 겸 키보드 주자로 채용되어 활동한 뒤, 1978년 또 다른 도전을 위해 밴드를 떠났다. 이듬해부터 카쉬프는 R&B에 신시사이저를 응용한 선각자 중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휘트니 휴스턴, 케니 지, 에벌린 샴페인, 조지 벤슨, 배리 화이트, 디온 워위크와 같은 아티스트들의 작곡가 겸 프로듀서로 활동하게 되었다. 또한 솔로로도 음반을 제작하여 1983년에 발표한 셀프 타이틀 앨범, 그리고 1984년에 발표한 <Send Me Your Love>, 그 다음 해의 <Condition of the Heart>와 같은 몇몇 앨범은 다수의 그래미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80년대를 아울러 카쉬프는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신시사이저가 유려하게 가미된 R&B와 훵크를 계속 발표해나갔지만, 다른 분야로 그의 관심사가 전환됨에 따라 그 이후부터 발표작들은 뜸해지게 되었다. 대신 교육자로서, 작가로서, 사회 활동가로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그리고 영화감독으로서 활동을 지속해나갔다. 이 글은 최근 RBMA 라디오와의 인터뷰의 발췌본이다. 카쉬프는 여기서 음악이력과 삶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어쩌다 카쉬프라는 이름을 택하셨나요?

 

보시다시피 제가 세상에서 제일 흔하디흔한 이름들을 타고났잖아요. ‘마이클하고 존스. 제가 카쉬프라는 이름을 고른 이유는 제 친구이자 멘토 중에 자말 라술 Jamal Rasool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B.T 익스프레스의 베이시스트였어요. 제게 이슬람식 이름을 고를 수 있는 책을 하나 주더라고요. 책을 쭉 훑어보다가 카쉬프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어요. 그 뜻이 발견하는 자, 창안하는 자, 그리고 마법을 만들어내는 자였어요. 이 이름을 보고 시쳇말로 심쿵한 거죠. 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B.T 익스프레스 시절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시죠.

 

아시다시피, 고등학교를 막 나와서 아무 것도 모르고 브루클린 지역을 나가본 적도 별로 없는 그런 아이였지요...... 그런데 그 밴드 경험을 통해서 시야가 넓어졌죠. 삶이란 어떤 것인가, 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하는 식으로요. 리허설에 가니까 밴드 멤버들이 저를 좋아해줬어요. 그 다음날 짐 가방 하나 챙겨 와라.” 그러더라고요. 가방을 챙겨 리허설 장소로 다시 가보니 큰 버스 한 대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디다. 옆에는 ‘B.T 익스프레스라고 써 붙여놨고요. 리허설 끝나자마자 막 바로 버스에 올라탔는데, 그 길로 2년 반을 투어로 떠돌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얼마나 꿈만 같고 충격적인 경험인지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그 덕에 제 마음 속에서 어떤 자각 같은 게 일어났어요.

 

B.T 익스프레스에서 나오시기 전부터도 신시사이저나 전자 악기를 이미 도입하셨죠? 어쩌다 전자 사운드를 계발하는 데 흥미가 생기셨나요?

 

그 이유야 음악적으로 더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자랄 때 영향을 끼친 뮤지션이 맥코이 타이너, 아트 테이텀, 허비 행콕, 칙 코리아, 리턴 투 포에버,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 배리 화이트 등 대중 음악의 틀을 유지하면서 재즈나 클래식도 넘보시는 엄청난 분들이었거든요. 이 분들의 영향으로 음악적으로 더 새로운 것을 정말로 시도하고 싶었고, 그러나 보니 제가 몸담던 B.T 익스프레스 입장에서는 좀 누가 되었던 거죠. 결국 저는 해고당했어요. 허구헌날 제가 이랬거든요. “리허설 좀 해 보자. 어딜 가? 리허설 좀 하자니까? 같이 작곡 좀 해보자.” 결국 일이 그렇게 되었죠.

 

선생님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이 R&B 음악과 프로덕션 스타일은 어떻게 만들어진 겁니까? 만들어내기에 쉬운 과정은 아니었을 텐데요.

 

어떤 의도를 가지고서 스타일을 만들어낸다거나 그런 것은 없었어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했을 뿐이죠. 그런 데에는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나 웨더 리포트 같은 밴드들의 영향도 있었어요. 재즈 밴드인 웨더 리포트는 음악의 공간감이나 짜임새에 대해서 아주 막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가 탁 앉자마자, “좋아, 이걸 내 사운드로 만들어보겠어.” 이러지는 않았던 거죠. 그저 음악을 만들다가 우연히 곡들이 히트를 기록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좋았어, 계속 이 방향대로 해보자.”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조지 벤슨 씨의 히트곡 “Inside Love”을 함께 작업하셨는데, 프로듀싱 작업에 대해 좀 말씀해주시죠.

 

아리프 마딘 (터키 출신의 유명 프로듀서, , 비지스 등을 제작 옮긴이)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조지 벤슨을 프로듀싱하신 그 위대하신 아리프 마딘요. “이봐, 카쉬프. 코우-프로듀서로 함께 뛰어보세. 아니면 내 대신에 조지 벤슨의 작업을 좀 해주든가.” 그래서 진짜로요? 조지 벤슨은 제 우상인데요. 바로 가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그러자 그 두 사람이 뭔데?”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지금 스튜디오 작업이 지금 한 다섯 개쯤 있는데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그 작업을 할 시간이 안나요. 두 달 정도 말미를 주실 수 있나요? 제가 그 동안 벤슨 씨 드릴 곡을 써놓을게요. 일단 날을 잡아놓고 스튜디오 작업을 계속하도록 하죠.” 그리고 두 달이 지나고 나서 계속 전화를 해오면서 곡을 잘 쓰고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그랬어요. “아주 잘 돼갑니다. 환상적예요. 마음에 쏙 드실 겁니다.” 그러면서도 콩나물 대가리 하나 못 그려 넣고 있었어요. 아니, 곡에 대해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죠.

 

스튜디오에서 그 두 분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어쨌든 장비니 기계니 뭐니 다 싸가지고 갔어요. 떨리는 마음으로 1시간 정도 일찍 갔습니다. 조지 벤슨과 만나는 자리잖아요. 만나고 나서부터는 조지와 한 시간 남짓 잡담을 나눴는데, 결국 물어보대요. “자네가 써왔다는 곡 좀 들어보세.” 그래서 , 한 번 들어보시려고요?”하면서 드럼 머신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안 들었지만 그래도 사전에 프로그래밍 해놓은 게 있었어요. 조지가 어우, 이거 좋아. 이제 됐네. 코드도 짚어보게. 또 뭐가 있나?” 오른손으로 코드를 짚다보니, 또 그럽디다. “오오, 이 톤이 맘에 들어. 베이스라인도 들어 보세나.” 그래서 왼손을 들어 키보드로 베이스라인을 짚어봤어요. 그러니까, “이야, 음악 죽이는구만. 가사도 들려줘봐. 가사는 어떻게 되나?”

 

당연히 가사가 없지요. 근데 그때 스튜디오에 설치된 개인 사설 전화가 울렸어요.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즉석에서 가사를 붙여 노래를 만들었죠. “그래 사설 전화로 우리는/ 오붓한 밤을 준비했었지/ 속삭이는 말들과 연인들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사적인 얘기들을 나누며.” 그냥 이런 식으로 내뱉듯이 하다 보니 노래가 되더라고요. 엔지니어도 꽤 영악한 사람이었던지라 녹음 버튼을 눌러뒀고요. 그래서 “Inside Love”가 탄생한 겁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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