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가 길어 세 도막으로 잘랐습니다. 스티브 애링턴이 말하는 슬레이브 시절의 회고를 들어보니 슬레이브의 팬을 자처하면서도 당시 밴드 구성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반부에 들어서는 거의 <낮은 울타리> 인터뷰 같은 내용인데요. 어떻게 종교를 만나고 목사가 되었는지, 왜 다시 음악계로 복귀하게 되었는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당시 대중음악과 스티브 애링턴에만 관심 있는 분들은 건너 뛰셔도 무방할 듯 합니다.
질문자: 그러면 한창 활동하시던 시기, 그러니까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의 분위기를 보면 훵크도 변화하는 것 같던데요. 사운드는 점점 깨끗해지고 싱코페이션(당김음)이 더 들어가고 더 타이트해졌어요. 어떤 게 이런 경향을 주도했다고 보십니까?
애링턴: 제 생각에는 그저 모든 음악도 매한가지지만 한동안 어떤 음악이 계속 나오면 하나의 스타일이 완성되는 거고, 그러다보면 이걸 다르게 해보자 하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히트곡을 만들어내면 갑자기 또 다른 누군가가 이전과는 다른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냥 간단합니다. 훵크가 변화해 온 이유는 이게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해왔고 또 누군가가 다른 관점으로 보고 다르게 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제 보컬도 그랬어요. 그냥 자연스레 그리 됐어요. 저도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음악이란 게 항상 그리 돼왔던 거라 생각해요. 무언가에 헌신하는 사람은 음악을 있는 그대로 대해야 합니다. 다른 관점을 지니려면 그래야 해요. 이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음악을 변화시켰어요. 솔직하게 마주하면 느낄 수 있어요. 그러면 일이 그대로 풀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질문자: 그럼 선생님께서 독특한 음색을 세상 밖으로 꺼내놓으셨는데, 이걸 따라하는 사람들은 없었나요?
애링턴: 아니, 왜 없겠어요. 사람들이 제 인터벌이나 딕션을 따라하기 시작하는 게 들려왔어요. "타임 인 마인드" 같은 노래를 예로 들면 (노래로) "메이크 유 므아아아인" 제 딕션이 이렇잖아요? "인 트아아아임" 다른 노래에도 이런 게 많이 나오더라고요. 저는 그래서 기뻤습니다. "아 정말, 사람들이 내가 어떤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았는지인지, 어떻게 내 나름으로 소화했는지 알아채기 시작했구나." 그러니까 냇 킹 콜 같은 가수들을 듣기 시작했을 때, 그 사람 딕션 같은 스타일을요. 그 딕션 말이죠. 한참 다음에 제가 보컬리스트가 된 후에 다른 가수들을 찾아듣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제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되었죠. 정말 제게는 가슴 벅찬 경험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제 목소리를 사람들이 들어준다는 건 뜻 밖의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제 스타일을 느끼고 제 인터벌들과 제가 어떻게 노래하는 지를 들어주고 이런 일들이 참으로 감동스럽습니다.
질문자: 그럼 뭐 좀 하나 더 들어볼까요? 어떠세요? "Watching You"요.
애링턴: 좋지요. 들어봅시다.
(음악 - "Watching You" / 박수)
질문자: 그러면 이게 슬레이브 3집에서 나온 곡이죠?
애링턴: 맞습니다.
질문자: 그리고 하나 더 같이 하셨고요.
애링턴: 맞아요. <Show Time>이죠.
질문자: 그리고 나서 본인 작업 때문에 밴드를 떠나셨고요.
애링턴: 네 물론이죠.
질문자: 무엇때문에 떠나셨나요?
애링턴: 글쎄요. 슬레이브와 함께 한 일은... 1집을 내고 나서부터도 멤버들이 들락날락했어요. 그런 이유겠죠. 딱부러지게 말씀 드리긴 뭐하지만요. 음악을 하다보면 비즈니스적인 측면 때문에 안정적이지는 못한데, 그런 이유 같아요. 슬레이브는 위대한 밴드였고 뛰어난 친구들이었고, 재능도 엄청났죠. 하지만 비즈니스라는 게 항상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비즈니스라는 거는 보시면,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하고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 재능을 잘 알고 필요한 데 쓸 줄 알아야 하는 거예요. 특히 첫 히트를 기록하고 나서, 만일에 그게 어느 정도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면 좌절하게 되죠. 슬레이브의 멤버들은 들락날락했어요. 저는 사실 멤버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제가 딱 부러지게 말씀드리기 못한다고 했던 거예요. 제가 음반 녹음할 때 드럼을 맡았고 보컬리스트도 되었지만 계약서에 사인한 정식 멤버는 아니었기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항상 사이드맨이었어요. 이상한 얘기죠.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밴드 내에서 어떻게 일이 굴러가고 돌아가는지 저는 알 길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비즈니스라는 게 음악과도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단 말씀만 드릴 수 있겠네요.
질문자: 그러면 어떻게 밴드서 나와 Hall Of Fame을 결성하시게 되었나요?
애링턴: 아시다시피 우리 중 몇몇은 그저 사이드맨이었어요. 로저 파커처럼요. 그래서 제가 "이봐 친구. 내 음악을 하려고 하는데 너희들 중에 나랑 함께 할 사람 있어? 사실 우리는 슬레이브 멤버도 아니잖아. 내 밴드에 들어와보는 건 어때? 우리가 밴드를 만들면 너희들은 다 계약 상의 정식 멤버들이 되는 거야." 찰스 카터, 샘 카터, 로저 파커, 빅터 갓시, 아서 레임즈, 레임즈는 뉴욕서 온 친군데 사실 고인이 되었어요. 이 자리를 빌어 명복을 빌어요. 이 친구들이 저를 따라왔고 우리는 '스티브 애링턴의 명예의 전당'을 이루게 된 거예요.
질문자: 나머지 슬레이브 멤버들은 떠난다니까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애링턴: 글쎄요. 원체 사람들이 들락날락 했으니까요. 마크 힉스와 더불어 슬레이브를 만든 사람 중의 하나인 스티브 워싱턴도 이미 떠난 상태였고, 그 친구와 스탈리아나 영과 커트 존스가 밴드를 떠나 'Aurra'를 결성했죠. 제가 떠나기 전에 이미요. 그 친구들은 <Stone Jam> 앨범이 끝나자 나갔어요. 제가 알기론 그 친구들이 떠났을 때부터 일종의 누수가 일어났어요. 제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고요. 저는 밴드를 나가 리드 싱어로 솔로 경력을 쌓아보자는 야심이 원래 없었어요. 아시겠어요? 전혀 그런 적이 없었어요. 밴드를 떠나면서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친구들이 다 저랑 함께 큰 친구들이잖아요. 그래서 또 우리는 줄곧 함께 해왔고 음악도 같이 만들었다, 이런 생각은 제가 아주 특별하고 독특했어요. 그러다보니 "얘들아, 나는 이것저것 다 싫구나, 이제 내 음악을 하고 싶어졌어." 이런 식은 아니었단 말예요. 진짜로 마음이 아팠어요. 무슨 이혼하는 것 같았어요. 우리는 친구였으니까. 남은 친구들이 후속 앨범을 내고 음악을 계속해나갔는데, 우리들은 밴드를 나왔는데도 차에서 그 노래들을 다 들어주고, 남아있던 그 친구들도 제가 부른 노래들을 다 들어줬어요. 우리는 친구잖아요. 비즈니스로는 함께 하지 못했지만요. 그 친구들은 여전히 저를 사랑해줬고 저도 그 친구들을 사랑했고, 또 슬레이브에 있다가 나간 모든 다른 친구들도 모두 서로가 있어 행복했고요. 함께 좋은 음반을 만든 사이였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 생각만 하면 너무나 기쁩니다.
질문자: 그럼 밴드를 이끄는 입장에서 뭔가 창조적인 것을 하기 위해 밴드에서 나오고 싶다, 이런 건 아니었어요?
애링턴: 그러고 싶기는 했죠. 슬레이브 시절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Steve Arrington's Hall Of Fame I> 앨범에 "Beddie-Biey"라는 노래가 있어요. ("Beddie-biey's the right time for us." 노래를 부른 후) 아주 재즈 느낌이 나죠. 사실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가 이걸 샘플링했어요. "The Chase, Part II"라는 곡이죠. 그런데 말예요, 그 친구들이 해놓은 게 마음에 들더라고요. 제가 찾아들어봤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슬레이브 시절에는 결코 하려들지 않았던 것들이었죠. 그리고 어떻게 음악을 하려고 하든지 간에 제게 주도권이 좀 더 있었죠. "Weak At The Knees"같은 곡이나 "Beddie-Biey"같은 곡들 보시면 그래요. 이런 곡들은 완전히 다른 스타일과 분위기가 있어요. 제가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죠. 저는 제게 영향을 줬지만 슬레이브 스타일에는 그다지 맞지 않아 오랜 동안 간직해두었던 것들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어요.
질문자: 그러면 이쯤에서 "Beddie-Biey"를 들어볼까요?
(음악과 함께 박수) 제가 홀 오브 페임 앨범 크레딧을 읽어봤는데 여기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악기들을 혼자서 다루셨는지 감이 안 섭니다. 정말 놀랐어요.
애링턴: 네, "Beddie-Biey"에서는 기타를 쳤어요. 제가 그 곡의 기타 파트를 작곡했고요. 아시다시피 재미있잖아요. 그 당시 사람들은 여러 악기에 손을 댔어요. 프린스는 많은 악기를 다룰 수 있었고요. 우리 모두 스티비 원더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많은 악기를 혼자 다루면서 그 자체로 완전히 독특하고 모든 악기들을 완전히 고유한 스타일로 연주할 수 있었던 스티비 원더처럼요. 당시에 사람들이 여러 악기에 손대고 있었고 저도 이렇게 생각했죠. "아, 난 더 많이 할 수 있어. 더 많이 할 수 있다고." 그러면서 "Nobody Can Be You But You"에서는 베이스를 쳤고요. "Beddie-Biey"에서는 기타를 쳤고요. 키보드랑 이것저것 다 했어요.
질문자: 그럼 당시에 작곡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애링턴: 경우가 다양했죠. 먼저 연주 트랙을 완성하고, 그 다음에 노래를 입힐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제가 먼저 멜로디 같은 것들을 흥얼거리면서 밴드 멤버들과 함께 그걸 받쳐주는 트랙을 완성하기도 하고요. 좀 다양했던 편이죠. 밴드로서 함께 하면서 우리는 항시 같이 지냈고 같이 그루브를 타고 잼을 하면서 지냈어요. 그리고 뭔가 악상이 떠오르면, "자, 자 그 부분은 우리가 살려놓자고." 이렇게 조금씩 함께 해나갔지요.
질문자: 이 말씀까지 듣고, 시간 관계상 좀 건너뛰어서요. 선생님께서는 좀 더 종교적인 음악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셨는데, 무슨 이유에서였습니까?
애링턴: 글쎄요. 제 영웅들, 그러니까 제 경우에는 존 콜트레인인데, 그 사람 음악을 들으면 기교 뿐만 아니라 자기가 들었던 것을 연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서 기술적 관점에서 우러나오는 예술성의 위대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 사람은 그런 능력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 음악을 들었을 때 좀 더 깊은 차원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차원이죠. 영적인 차원이 저를 매혹시켰어요. 어렸을 적에 교회를 중요하게 생각했었고 집안에 목사가 많았습니다. 제 종조부인 찰스 쿡 목사님께서 저를 '으막 Moosic'이라고 부르곤 했어요. '꼬맹이 으막이 왔구나. 으막아." 자라면서 그 분께서 설교를 하시곤 했는데 교회의 긴 의자에 앉아 그 분 설교를 듣던 생각이 납니다. "아, 정말 그 분의 열정이란...." 그리고 그게 제 노래 속에도 살아있었던 것 같아요. 제게도 발산하지 못한 열정이 있었죠. 그걸 자연스레 내보내기만 하면 됐어요. 어떻게 아름답게 소리를 낼 수 있을지 몰랐어요. 신경도 안 썼고요. 그저 그 열정을 발산했던 거예요. 종조부께서 설교하시는 걸 보고 느꼈어요. 그 분은 열정을 갖고 부딪히신 거예요. 그래서 저도 그 열정을 계발해나갔고, 아시다시피 카를로스 산타나, 뭣이냐 그 동방 종교에 빠진 사람들, 그러니까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같은 사람들조차도 그 열정을 갖고 빠져든 거예요. 그런게 제 어딘가에 항시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빠져들어야 했던 거죠 그래서 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실 뉴욕에서 45번가였나 42번가였나, 하여간 근방에서 거리를 걸어 내려오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표지판을 하나 들고 표어가 박힌 옷을 입고 있죠. 제 말은,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봐왔잖아요? 일찌감치 투어 버스에 올라서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것보다 나은 것이 분명 있을 텐데."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지만 제 안의 영적인 부분이 좀 더 발전되었어야 했던 겁니다. 어쨌든 그 남자가 거기에 서 있더라고요. 제가 그랬죠. "이봐요, 거기 너무 나간 hardcore 거 아니요?" 저는 제리 컬 (꽈배기 과자 모양으로 땋은 흑인 남자 머리 - 옮긴이) 머리를 하고 있었고 뭐 저도 막 나가는 상태였죠. 그런데 저는 제가 원하는대로 막 나가는 거였고요. 저도 당시에 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뭐 가끔씩은 머리에 헤어롤도 꽂고 다녔고 대마도 하나 말아 피웠죠. 스눕 아시죠? 스눕이 하기 전에 제가 그러고 있었죠.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세요?
(웃음)
제가 그랬어요. "이 봐요. 나는 막 나가는 놈이야." 하지만 이렇게 덧붙였죠. "나는 그래도 당신만큼은 아닌 것 같수. 표지판 같은 것도 들고 있고 옷에 글씨도 써 놨네? 뭐? 예수님이 오신다라니 그게 뭔 소리야?" 그 사람은 제게 종교 책자들을 보여줬는데, 그 뉴욕 길바닥에서 주님을 만나서 이제껏 주님을 경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진짜입니다. 제 음악은 거기로 방향을 틀어야 했어요. 제 영성으로요. 말씀드렸다시피 네, 그 방향으로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은요. 영적인 측면이 음악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 방향으로 가게 된 거고요. 음악의 모든 순간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 살아왔고, 전도하는 사람으로, 또 예배와 찬양 인도자로 살아왔고 또 제 교회도 있었어요.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앎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무엇을 말이냐고요? 우리가 지금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든 위대한 것들 말에요. 그리고 저는 매분 매초를 사랑하지만 우리가 홀로 있으면서 이렇게 묻는 시간도 있잖아요. "어째서지? 이건 뭐지? 나는 무엇을 하고 있지? 내가 여기서 하려고 하는 건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제게는 이 질문들 때문에 제 길을 택한 겁니다.
질문자: 그 이후로 쭉 공백이 있으셨죠.
애링턴: 네 25년 동안이나요. 제가 보기에는 제가 할 말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때문예요. 가끔씩 사람들은 음악이나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그 당시 저는 할 말이 없었어요. 그게 다른 음반을 만들 수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히트곡을 더 만들어낼 수 없었단 얘기도 아니고요. 당시에 대해서 제가 언급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은 다른 데 있었어요. 저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루에도 몇 시간 씩 기도를 했어요. 몇 시간이나 이어지는 기도와 성경 공부, 그리고 계속되는 순회 전도 일정 끝에 저는 그때 그게 사랑임을 깨달았어요. 그게 전부예요. 거리에서 제가 그렇게 되었듯이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요. 그렇게 하고나서부터 깨달았어요. 무엇이냐고요? 사랑이었습니다.
(웃음)
단순합니다. 그렇게 25년이 지나고 난 뒤에 이런 얘기들이 있었죠. "그동안 무엇을 하셨습니까? 음악으로 돌아오셨네요." "네, 맞습니다.","무슨 이유에서죠?""그저 누구가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제 말은 저는 이런 일을 교회에서 했어요.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싶었고 그래서 "이게 다 사랑 때문이야"라고 하면서 이 자리에 서고 싶었습니다. 이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의 요점입니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란 거죠. 정치적인 이유든 뭐든 다른 모든 것들을 다 찾아봐도 결국은 사랑이었어요. 제가 음악을 들을 때, 그리고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말씀을 드리고 또 여러분들을 볼 때, 이 자리가 영광된 자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말씀을 이 자리에서 드릴 수 있겠네요. "아세요?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그래도 서로를 사랑하세요." 그것만이 오래 갑니다. 그것이 진정 강력한 거예요. 그게 여러분을 지탱해나가는 거예요. 돈이 여러분을 지켜주지 못해요. 명성이 여러분을 지탱해주지는 못해요. 샌드위치, 맛 좋은 샌드위치도 소용없어요.
(웃음)
그저 사랑입니다. 그래서 돌아온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이예요. 어쩌면 감정적으로 훵키한 사람요.
(웃음)
제 말뜻을 아시겠으면 말이죠. 감정적으로 훵키한 사람이라는 말을요. 그 밖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들 속에 들어가 그 사람들이 원한다면 사랑을 전하고 싶을 뿐이죠. 그 사랑을 느낄 수 없다해도 저는 이해하고 계속할 수 있습니다. 안되면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면 되는 거죠.
(웃음)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어요? 제 말은 진짜, 제 말은 진짜 진짜 간단해요. 왜냐하면 이런 게 제가 25년 동안 탐구하고 또 탐구하고 오랜 동안 성경을 들춰보고 책을 읽고 공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절대로....제가 낸 모든 음반들을 외면했어요. 심지어 일반 TV 채널은 보지도 않았어요. 오로지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을, 100번씩, 교회, 그리고 전국 순회 전도 일정에, 그게 제 일이었어요. 순회 전도를 다니는 게 너무 좋았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그게 너무 좋았어요. 그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얘야, 그 교회의 네 귀퉁이 바깥에서도 사랑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그래서 여기 나타난 거죠.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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