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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ypus - Ice Cream Delight (1980)

Baron Samdi 2020. 7. 6. 17:51

한 줄 단평 : 프로그레시브 록의 탈을 쓴 훵크 레전드

 


 

 

Platypus는 훵크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는 오하이오주 데이튼 출신으로 내가 가장 위대한 훵크 밴드로 꼽는 슬레이브와 동향이다. 데이튼은 인구 15만에 불과한 도시지만 여기서 오하이오 플레이어즈, 히트웨이브, 데이튼 등 무시무시한 밴드들이 배출됐다. 내가 이 밴드를 사랑하는 이유도 사운드 면에서 슬레이브와 유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슬레이브와 플래티퍼스 모두 딥 퍼플과 레드 제플린, 제네시스 같은 록 밴드들이 오하이오 훵크 밴드들에게 영향을 미치던 시기에 결성된 밴드이며  두 밴드 모두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예스의 영향을 받았다. (훵크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주장하는 일부 흑인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보여주는 사례 아닐까?)

 

보컬 겸 퍼커셔니스트 Arthur "Hakim" Stokes, 드러머 Curtis Sanford, 기타의 Larry Hines (사망 후 Jerry Johnstone으로 대체), 베이스와 키보드에 Lloyd Jones, 그리고 보컬 겸 작곡, 프로듀서를 맡은 Kerry Rutledge로 결성되었다. 이 중에서 케리 루틀리지는 다이애너 로스의 "Love Hangover"에서 퍼커션과 보컬로 참여하기도 했다.

 

플래티퍼스의 모태는 하킴 스토크스가 주축이 된 The Four Corners라는 밴드였다. 이들의 곡 "What Goes Around Comes Around"는 데이튼을 잠시 방문했던 잭슨 파이브의 프로듀서였던 Hal Davis의 눈에 띄어 마이클 잭슨의 72년 앨범 <Ben>에 수록되었다. 모타운이라는 좋은 기회를 잡은 멤버들은 캘리포니아로 옮겨왔지만 동향 출신의 밴드 Lakeside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이 지내다가 우연히 The Bar-Kays의 매니저 Sandy Newman을 만나게 된다. 샌디 뉴먼은 이들의 매니저를 겸하면서 함께 매니저 일을 해나갈 Barbara Smolen을 소개했다. 바로 이 바바라 스몰렌이 밴드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다. Platypus, 오리너구리라는 밴드명은 오리와 비버 등 다양한 동물의 특징을 보유했기에 각양각색의 음악적 스타일이 조화롭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멤버들의 지지를 받았다. 게다가 이름 덕분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호주 시드니 방문 기회도 생겼다. 여기서 Platypus는 Joe Cocker도 만나고 존경해오던 Yes의 Rick Wakeman도 만났는데, 웨이크먼은 Platypus가 이제껏 봐왔던 밴드 중 가장 정확한 연주를 하는 밴드라고 극찬을 한다. 예스의 팬으로서, 그리고 흑인으로 성장하면서 재즈와 R&B를 많이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프로그레시브 록에 더 관심이 많았던 멤버들은 이 칭찬에 우쭐해질 수밖에 없었다. 

 

밴드 멤버들은 특이하게도 예스는 물론, 마하비슈누 오케스트라와 제네시스로부터 영향을 받아 컨펑션 같은 밴드를 지향하기보다는 훵크와 프로그레시브 록이 융합된 음악을 시도했다. (내가 듣기에는 그저 1집은 샐소울, 2집은 오하이오 훵크인데.....) 멤버들은 모두 자신들이 소울을 연주한다기보다는 항상 록을 지향해왔고 일본에서 활동할 때, 일본인들이 "Between Rock and Roll"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플래티퍼스의 음악을 잘 표현한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이 무렵 친구로부터 누군가를 소개받았는데 형제 중 하나가 로버타 플랙과 결혼한 사이였다. The Bottom Line이라는 클럽에서 연주하던 밴드의 모습을 눈여겨 본 로버타 플랙이 이들을 뉴욕으로 데려와 경력을 쌓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벌어진 도니 하더웨이의 비극적인 죽음 때문에 로버타 플랙은 무너져 내렸고 결국 밴드는 뉴욕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신시내티에 스튜디오를 소유한 Rich Goldman이 카사블랑카 레코드와 다리를 놓아줬다. 계약을 마친 뒤 앨범 작업 마무리를 L.A에서 했는데 스토크스는 "계약을 맺으려고 L.A의 모든 레코드 제작사들을 돌아다녔지만 결국 고향의 돌아와서야 L.A에 있는 회사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는 씁쓸한 회상을 남겼다. 카사블랑카에서는 이들이 스티비 원더나 E.W&F와 같은 음악을 하기를 바랐지만 멤버들은 예스의 음악에 경도되어 있었고 카사블랑카에서는 백인 록 밴드의 음악을 지향하는 밴드의 앨범에 무슨 사진을 내걸어야 할 지 모를 지경이라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고 이런 갈등은 홍보 부족으로 이어진다. 

 

1979년에 밴드의 첫 앨범이 나왔다. 셀프타이틀 앨범 <Platypus>. 이때 문제가 생긴다. 기타리스트 래리 하인즈는 캘리포니아 시절부터 종종 두통에 시달렸는데, 병원에 가도 별다른 처방이 없었다. 남가주대학병원에 가니 청천벽력 같은 백혈병 진단이 나왔다. 결국 치료는 캘리포니아에서 받고 신시내티로 날아와 앨범 녹음에 참여하기로 했다. 녹음이 끝나고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치료를 연장했지만 결국 사망. 5명이 연주하고 노래했지만 앨범 재킷 사진에는 네 명만 나왔다. 래리 하인즈의 후임으로는 Jerry Johnston이 들어왔다. 2집 <Cherry>를 녹음하던 시기는 카사블랑카가 폴리그램으로 넘어가던 시기로 멤버들 사이에서는 첫 앨범 발표 당시의 회사의 홍보 부재와 소극적인 지원으로 불만이 팽배했다. 멤버들이 극구 사양했음에도 보다 춤추기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마빈 게이의 친구이자 모타운 프로듀서인 Art Stewart를 내려보냈다. 만약 멤버들의 의지대로 프로그레시브 록을 구현했으면 어땠을까? 멤버들의 지향과 다른 음악이 나온 이유도 카사블랑카 측의 간섭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되는 대목이 있다. 2집 앨범 재킷에 대한 하킴 스토크스의 회고가 재미있다. "나는 그 여자가 누군지도 모른다. 다 회사에서 알아서 한 건데, 아마 오하이오 플레이즈를 따라한 것 같다." 멤버들은 새 프로듀서 아트 스튜어트에게 "우리는 R&B 밴드가 아니라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다! 당신이 들고 온 곡들은 너무 R&B다."라고 항변했지만 결국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중성을 더욱 가미했다는 2집이 1집보다 더 적게 팔렸고 홍보는 여전히 없었고 공연조차 잡히지 않아 한동안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멤버들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고 항상 중재를 맡아왔던 래리 하인즈가 사망하는 바람에 말릴 사람도 없어졌다. 밴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해체의 순서를 밟게 되었다. 

 

여기에 소개할 곡 "Ice Cream Delight"는 은 키보드와 베이스를 맡은 로이드 존스가 작곡한 곡이면서 존스가 가장 사랑하는 플래티퍼스의 곡. 또 내가 매우 즐겨듣는 곡이기도 하다. 이 곡은 아무리 들어봐도 예스보다는 팔리아먼트/훵카델릭에 가까운데 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임을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판단에 앞서 일단 들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