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Funk> 2-27 - 슬라이 앤드 더 패밀리 스톤 Pt. 3

Baron Samdi 2016. 6. 24. 16:16

쇼 비즈니스에서 기회를 잡아 1966년에 결성된 밴드의 원래 이름은 스토너즈the Stoners였다. 슬라이는 밴드를 새로운 라인업으로 정비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모든 젊은이들이 이 밴드에 매료될 것”이라는 말로 CBS 레코드의 회장이던 데이빗 캐프럴릭David Kapralik을 설득해서 CBS와 계약을 맺었다. 슬라이는 음반 산업계에서 흑인 록 스타로 포장된 최초의 가수였다. 그의 자신을 상품화하는 능력은 백인이 주도하던 음반 산업계를 압도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주었고 시대의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패밀리 스톤이 성장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그렇게 자유분방한 흑인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슬라이만큼 체제를 잘 이용할 수 있는 뮤지션은 찾아보기 힘들다. 예를 들어 제임스 브라운은 흑인 라디오 사운드라고 정의될 정도로 흑인 라디오 채널에 둘러싸여 있었다. “Say It Loud”가 히트한 후에는 더욱 더 백인 라디오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의 음반 제작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에도 불구하고 아주 효율적으로 주류에서 배제되었다. 반면에 슬라이는 아발론Avalon이나 필모어the Fillmore와 같은 백인 록 클럽이든, 아니면 할렘에 있는 아폴로 극장에서든 어느 곳에서나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록커들만큼이나 R&B를 쏟아낼 수 있었고, 백인 가수들만큼 많은 출연 계약을 맺었으며 무대 위에 올라가자마자 다른 가수들을 휩쓸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거친 몸짓은 당시 전국을 휩쓴 가장 혁신적인 발명이었던 컬러 텔레비전에도 잘 맞았다. 1968년 에드 설리번 쇼에서 <Dance to the Music>으로 데뷔하면서 슬라이는 곧 다가올 새로운 시기에 준비된 가수임을 증명했다. <Dance to the Music>은 어디에서나 울려 퍼졌다. 런던의 디스코텍에서도, 멤피스의 거리에서도, 로스 엔젤레스의 교외 주택가에서도 울려 퍼졌다. 스티브 레이크Steve Lake는 그 음반의 여파를 이렇게 설명한다.

 

1968년의 몇 달 간 슬라이는 사람들을 전 세계 디스코텍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트만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드러머 뿐!” 쿵 쿵 쿵. 그러나 노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의 모자이크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다층적인 목소리, 휘갈기는 듯한 관악기, 거기에 프레디 스톤의 기타가 낮게 깔린다. 그리고 베이스. 항상 그 베이스. 세분화되고 덜컹거리는 베이스, 그것이 바로 슬라이의 음반 전반에 걸쳐 꾸준히 나타나는 요소 중 하나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혁신 가운데서 가장 널리 모방되는 요소 중의 하나다.

 

그 음반에서는 각 멤버들이 한 소절 씩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맡은 악기의 연주에 따라서 소개된다. “휘갈기는 듯한” 관악기는 비밥 계통의 괴상하면서 고상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최신 모타운 음악과 같은 아주 긴박한 싱코페이션을 반복한다. 오르간은 교회의 가스펠 합창에서나 나올법한 지글거림을 보여주는 반면, 베이스와 드럼은 인권 행진의 발걸음과 같이 힘차게 울린다. 음악 면에서나 가사 면에서나 이 슬라이 스톤야말로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표명할 수 있는 밴드였다.

 

(20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