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JFK (1992)
제목과는 다르게 존 F. 케네디의 일생을 다루는 영화도 아니었고, 케네디 암살 사건 또한 중심 주제가 아니었다. 이 영화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온갖 사회적 압력에 굴하지 않는 개인의 양심과 집념이다. 뉴 올리언즈의 지방검사 짐 개리슨이 쓴 책을 토대로 암살 사건을 둘러싼 온갖 가정들과 추측들을 다룬다. 케빈 코스트너를 비롯해, 잭 레먼, 조 페시, 토미 리 존스, 도널드 서덜랜드, 마틴 신, 게리 올드먼 등 오스카 상 시상식을 방불케 하는 캐스팅에 원작자 짐 개리슨도 얼 워런 역으로 출연한다. 3시간 30분 정도의 러닝 타임이 유독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감독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영화적 재미를 감소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보다는 시사물의 재연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는데, 사건 당시의 건물들을 실제 로케이션으로 삼고 총격 사건이 그대로 찍힌 재프루더 필름을 저본 삼아 영상으로 재현하려는 리얼리즘에 대한 집착은 인정하지만 좀 더 효율적으로 구성을 정리해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영화에는 사건의 재구성과 주장들만 있지, 연출이 없다. 영화팬들에게 권할만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봐야 할 영화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말하겠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주장들은 우리가 잊기는 쉬워도 늘 명심해야 하는 얘기들이다. 이 영화가 음모론적 시각을 과장해서 연출하고 있다는 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미국 현대사>라는 탁월한 역사서의 저자이자, 훌륭한 역량을 지닌 역사가인 올리버 스톤이 음모론에 동조한 나머지, 그런 시각을 키우기 위해 이 영화를 연출한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음모론적 시각은 관객들의 흥미를 끌겠지만, 이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나무가 아닌 숲을 봐야 한다면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내가 이해한 바로는 명확하다. 국익이라는 이유로 빈번하게 진실을 감추려 든다면 가장 위협받는 것은 이 사회의 민주주의다. 이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진실이 소수의 수중에만 떨어진다면 그 사회는 파시즘과 다를 바 없어진다. 이 영화는 타임킬링 용이 될 수도 없을뿐더러 너무나 중요한 얘기들을 마지막 짐 개리슨 검사의 입을 빌어 전하고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새겨들어야 할 얘기들이다. (★★★★)
17. 리오에서 온 사나이 (1964)
장 폴 벨몽도, 자동차 사고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프랑수아즈 돌리악 주연의 모험 영화. 영국의 <007> 시리즈에 맞서 프랑스에서 <땡땡>을 소재로 영화를 만드려고 했으나 전혀 다른 영화가 탄생했고 나중에 땡땡의 원작자 에르제도 만족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스필버그에게 영향을 끼쳐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영화사적 의미는 여기까지고 1시간 50분이 15시간으로 느껴질 정도로 지루하다. 말텍 문명의 신비와 그 속에서의 모험을 기대했다면 오산이고 80년대 홍콩영화와 유사하지만 더욱 어설픈 액션과 아크로바틱으로 러닝타임을 때우고 있다. 볼 것이 부족한 옛날에 봤더라면 혹여나 재미가 있었을까, 주인공의 익살에 온 세계가 장단 맞춰주는 유치한 내용에 재미를 느끼기에는 너무 멀리 오지 않았을까. (★☆)
18. 오뎃사 화일 (1974)
프레드릭 포사이스 원작. <자칼의 날> 영화를 보고 원작소설을 읽으면 영화에서 생략된 디테일이 더 살아나서 즐거웠던 경험이 있는데, 이 영화 또한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원작소설이 출간된 지 오래되어 구할 길이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이 영화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다 들어있다. 영화에서 독립 저널리스트 페터 밀러는 우연히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 노인의 비망록을 발견하고 에두아르트 로쉬만이라는 악랄한 나치 친위대 간부와 그가 속해있으며, 전직 나치 친위대원으로 이루어진 서독의 비밀 단체 '오데사'의 정체에 접근하게 된다는 얘기다. 특히 역사적 범죄에 대한 단죄가 없는 한국에서 이만한 대리만족도 드물다고 본다. 영화는 70년대 영화 치고는 세련된 연출을 선보이는데 내가 가진 아주 사소한 불만은 영화보다는 소설에 대한 것이다. 엔딩에서 주인공의 목적의식이 드러나는 독백이 있는데, 앞서 말한 역사적 범죄에 대한 철저한 추궁과 단죄를 통해 정의를 극복한다는 보편적 의미가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다. 이 점은 통속소설가로서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뛰어난 면모이지만 역설적으로 작품의 의미를 축소해 버린다. 또 영화에서도 보면 탁월한 디테일이 눈이 밝은 사람에게는 흥이 깨지는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 같은 독일 영토 내에서도 벤츠와 같은 독일차를 사용하지 않고 시트로엥을 모는 사람들의 정체를 쉽게 추측할 수 있다든지, 그런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컷부터 엔딩까지 눈을 뗄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한다. 더욱 놀라운 점은 아이히만을 법정에 세운, 유명한 시몬 비젠탈이 이 영화의 자문을 맡았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과 단체는 실존한다. 포사이스의 매력은 이렇게 픽션과 논픽션을 뒤섞어 양자의 힘을 강화한다는 데 있다. 음악감독도 출세하기 일보 직전의 앤드류 로이드 웨버 경이 맡았다. 연출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후반부에 음악이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다. 감독이든 웨버든 그 고집을 꺾었어야 한다. (★★★☆)
19. 리스본 특급 (1972)
DVD 발매명은 <Un Fic : 형사>. 범죄물의 거장 장 피에르 멜빌의 마지막 영화. 국내 군소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DVD 자막들은 번역기 돌린 것만도 못한데 영미권 영화는 대충 커버한다고 쳐도, 프랑스 영화가 이러면 답이 없다. 어찌어찌 내용은 이해했으나 정확한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에두아르 콜망 경위는 민완 형사로 캐시라는 여자와 밀회를 갖는데, 캐시의 남자친구이자 나이트클럽 주인인 시몽과도 친구 사이다. 어느 날 은행강도 사건이 발생하지만 콜망은 진범이 친구 시몽인지 모른다. 정보원으로부터 대량의 마약이 파리-리스본 구간 급행열차에 실린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그리고 같은 첩보를 입수한 시몽은 마약 탈취계획을 세운다. 멜빌의 영화답게 꿈도 희망도 없이 암울하고 시종일관 푸른빛의 필름 톤만큼이나 냉정하다. 마지막 신에서는 콜망이 여자친구를 사이에 둔 치정 때문인지, 아니면 정당방위인지 애매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는 인물들의 심리를 알 수 없다. 다만 영상에 주어진 단서로밖에 추측할 뿐. 그만큼 불친절함에도 매력적인 이유는 편집의 효율성을 생략한 채,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끈질기게 고수하는 멜빌의 집요함 때문일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행위들을 쓸데없이 길게 보여주면서 관객들이 컷과 컷 사이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여유를 벌어준다.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단호하지만 이런 여유들이 내러티브의 재구성에 더욱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미셸 콜롱비에의 음악도 절묘하기 그지없다. 멜빌은 아마 효과음과 음악을 가장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감독 중의 하나일 것 같다. 마치 재즈 트랙처럼 보고 또 보고픈 영화. 영화 크레디트를 보면 네포티즘의 결정체인데, 조감독이 알랭 들롱의 동생, 스크립터는 장 가뱅의 딸, 조감독과 편집자는 자크 타티의 아들, 딸이다. 프랑스 영화판이 좁은 것인가? (★★★)
20. 닌자 : 오다 노부나가를 암살하라 (1962)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 이치가와 라이조 주연.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이 좌파 감독이라는 것은 익히 들었지만 영화 자체도 평범한 권선징악 무협물이 아닌 것 같아 찾아보니 원작 소설이 일본 공산당 기관지인 <아카하타> 연재물이었고, 원작자는 무라야마 토모요시. 무라야마 토모요시는 소설가, 극작가, 배우,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재다능한 활약을 했던 사람으로 한국에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연극론>이 소개되어 있다. 수리검이나 표창 같은 닌자의 특색을 살린 인술의 활용이 기존의 찬바라 영화들과 다른 점이다. 주인공 이시카와 고에몬은 폭군 오다 노부나가를 죽이라는 스승의 명을 받지만, 유곽에서 만난 연인 마키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어 암살을 미룬다. 이 영화에는 선함을 대표하는 인물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데, <아카하타> 연재물이라는 편견 때문인지 폭군 오다는 국가권력, 비열하게 암살을 충동질하는 스승과 닌자 집단은 당권력, 스승의 아내를 탐하는 닌자 고에몬은 일본 좌파 지식인의 은유로 읽힌다. 60년대 영화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에 어설픈 점은 보이지만 또한 60년대 영화임을 감안하면 매우 잘 만든 영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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