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동동의 여름방학 (1984)
올해 본 가운데 가장 좋았던 영화. 허우샤오시엔이라는 거장의 이름에 위축되어 어려운 영화일 것으로 상상했으나 동동과 함께 하는 여름방학처럼 즐겁고 흥미롭고 흡족한 영화였다. 여름이 올 때마다 꺼내보고픈 서랍 속 추억 같은 영화. 대만의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이야기, 혹은 일본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동북아 3국의 보편적 추억이 형상화되어 있다. 특히 나처럼 여름방학에 기차를 타고 외갓집에 가서 돗자리 위에서 졸기도 하고 물놀이도 즐기던 사람에게는 다시 어린 시절의 여름방학으로 돌아간 듯한 마음일 정도로 영화 감상이 이다지도 즐거운 경험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 가끔 다시 보고 싶다. (★★★★★)

17. 프로메테우스 (2012)
에일리언 시리즈의 팬이라면 <에일리언 1>과 서사구조에서 유사성을 많이 발견할 만한 영화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본다면 자가 복제나 다름없어 실망할 요소도 많다. 한 마디로 말해 새로울 것이 없다. 목적은 다르지만 외계 문명으로 보이는 곳에서 외계 생물과 조우하고 우주 함선의 승조원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는 얘기다. 그래서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포장만 바꿔서 내세운 것 같다. 겉으로는 인류 창조에 대한 거대한 이야기를 할 것 같지만 SF 괴담집에 나오는 인류 고대 문명은 외계인들이 창조했다는 이야기 이상을 넘지 않는다. 시간 때우기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 (★★★)
18. 살목지 (2026)
내용 없는 점프 스케어 포르노. 감독 혹은 편집자 지망생에게 점프 스케어 학습용으로 쓸 만하고 그 외에는 별 가치가 없다. 깊이 없는 호러만큼 팬들을 좌절시키는 것이 달리 있을까? 감독이 호러라는 장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관객이 많은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는데, 깊이 있는 이야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속적인 자극에만 반응하는 어린 관객들에게는 어딘가 호소하는 데가 있는 것 같다. (★)
19. 미스틱 리버 (2003)
숀 펜, 케빈 베이컨, 팀 로빈스의 연기 차력쇼. 한 동네에 살던 지미, 숀, 데이브 중 데이브가 아동성애자에게 납치되어 성폭행 당한 뒤 풀려나고, 시간이 흐른 뒤 지미의 딸이 죽은 채로 발견된다. 폭력배인 지미와 경찰인 션은 나름대로 수사를 진행하고 급기야 지미는 데이브의 행적을 의심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세 명의 금이 간 우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파수꾼>과도 비슷하다. 나는 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배우로서는 모르겠으되, 과대평가된 감독이라고 생각해 왔다. 주제의식이 각별히 뛰어나지도 않고, 앵글이나 숏 구성도 그저 그렇고, 연출력도 그만그만한 상태로 유명 연기자의 후광으로 감독의 명성을 이끌고 있다고 봤다. 하지만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고작이라고 할 만하다. 후배 연기자들의 연기력에 빚지고 있거니와 원작이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죄'는 영어로 'sin'과 'crime'으로 옮긴다. 전자는 신 앞에서 짓는 죄, 자신에 내면에 비추어 드는 죄의 감정을 통칭하고, 후자는 법률 상의 위반,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죄의 개념이다. 나는 지미와 션이 이 두 가지 죄의 개념의 알레고리라고 본다. 그리고 데이브는 속죄를 위한 희생양이기도 하다. 단순한 범죄물로 치부하기에는 깊이 있는 이야기인데, 좀 더 나은 감독이 연출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20. 블랙 레인 (1989)
리들리 스콧의 와패니즘 범벅 액션 스릴러. 부실한 서사라는 평가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문화간의 조우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잘 녹여내서 그런지, 그다지 부실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특히 마이클 더글러스, 앤디 가르시아, 다카쿠라 켄, 마츠다 유사쿠라는 미국과 일본 양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의 열연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이들이 한 앵글에 담기는 것만으로도 흡족할 지경. <러시 아워>의 원조라고도 할 법한데, 얀 드봉이 촬영한 오사카는 로버트 엘스윗이 찍은 L.A 만큼이나 좋다. 필름 카메라는 아무리 좋은 디지털카메라가 따라올 수 없는, 그만의 분위기가 있는 것. 가장 좋아하는 신은 앤디 가르시아가 뻣뻣한 다카쿠라 켄을 무대 위로 불러 올려 함께 레이 찰스를 열창하는 장면. 모터사이클 경주로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가 큰 인상을 주지 못하고 촌스러운 점, 그리고 결말이 조금 엉성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흠이 없다. 플라자 합의 이후에도 성장세를 구가하는 일본에 대한 80년대 할리우드의 경외심이 그대로 담겨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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