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스캇 헤론 인터뷰
마지막 시인.
피터 시슨
길 스캇 헤론은 어리석은 얘기를 곱게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오후 뉴욕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걸려온 전화로, 이 61세의 작가 겸 아티스트는 지난 40년간 시와 소설과 노래 가사를 통해 보여준 바와 같은 유머와 독설과 통찰력을 결합하여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그와 힙합이 어떠한 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요새 힙합은 모릅니다. 다만 개개인으로서의 래퍼만을 알뿐이죠.” 곧 출간될 그의 책 <마지막 휴일> (The Last Holiday)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려 하자, 그는 현재 628번째 페이지를 쓰고 있으며 페이지 하나하나 얘기하고 싶지만 독자들이 직접 읽게 하고 싶다고 했다. 대화가 끝날 무렵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DNA를 빼놓고는 전부 털어놓았어요. 이제 얘기는 충분한 것 같죠?”
헤론의 인내심은 벌써 바닥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시카고에서 태어나 테네시 주와 뉴욕 브롱크스에서 자라난 스캇 헤론은 문학에 대한 열망과 사회적 의식을 일찍부터 드러내었다. 1968년, 19세의 나이로 소설 <The Vulture>를 쓰고 나서 1970년에는 <Small Talk at 125th and Lenox>로 긴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브라이언 잭슨, 말콤 세실 같은 음악가들, 밥 틸리, 클라이브 데이비스 같은 음악계의 전설들과 협업해왔다. R&B와 사회정치적 메시지들이 결합된 그의 음악적 영향력은 “The Bottle”이나 “The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와 같이 독창적인 곡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곡들의 영향력은 여전하며 실제로 힙합의 발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스캇 헤론의 최근 음악적 성과들은 올해 (2010년) 초 <I’m New Here>가 발매되기 전까지는 그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시인의 진실한 관찰력과 현대적인 음악이 짝을 이룬 이 음반은 ‘XL 레코딩즈’ (음반사)의 소유주인 리처드 러셀의 개인 프로젝트로서 2006년 그가 코카인 소지를 한 아티스트들이 주로 수감되어 있는 (뉴욕 시의) 라이커스 섬에 스캇 헤론을 방문하러 오면서 시작되었다. 스캇 헤론의 바리톤 목소리는 이제 세월의 풍파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의 집중력과 문학적 고결성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피터 시슨 (이하 생략): 새 앨범의 첫 곡에서 언급되고 있는 테네시 주에서 할머니와 살 때 얘기 좀 해주세요. 할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으신 게 있는지요.
길 스캇 헤론 (이하 생략): 할머니는 정규 교육을 그다지 많이 받으신 분이 아니었어요. 저에 뭔가 알고 싶으시면 이 점을 먼저 아셔야 하는데, 할머니는 독실한 신자이셨고요. 자녀들을 다 대학 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게 하셨고 교육을 받고 글을 읽어야 한다는 굳은 믿음을 갖고 계셨어요. 테네시 주에 큰 서재를 갖고 계셨는데 저는 거기서 많은 시간 책을 읽었습니다.
그 때 당시 영향을 받으신 책이 있나요?
랭스턴 휴즈의 작품을 많이 읽었어요. 휴즈는 <시카고 디펜더>지와 <암스테르담 뉴스> 그리고 흑인 신문에 칼럼을 기고했어요. 저희 가족은 <디펜더> 지의 구독자였고요. 일주일에 25센트씩 냈던 것 같은데. 정말로 많은 영향을 받았죠.
뉴욕 시로 나중에 이주하시고 나서 랭스턴 휴즈에 대한 글도 쓰셨죠? 그렇죠?
네. 휴즈는 <뉴욕 포스트>지의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요. 연설도 했어요. 그래서 저도 그 연설을 들으러 갔었죠. 저는 녹음기가 있었고 휴즈의 연설을 녹음해서 그 연설에 나온 얘기로 글을 썼습니다.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 때 나이가 11살이었어요. 주위 사람들에게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우주 비행사나 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저는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진 투머나 랭스턴 휴즈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당신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을까요?
랭스턴은 매우 문학성이 높고 다양한 분야의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머 감각도 있었고요. 그 당시는 좀 특별했기 때문에 (역자 주 – 인종 차별이 현재보다 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유머 감각은 없었으니까요. 사람들이 화가 나 있었고 그렇게 분노했는데도 휴즈가 그런 유머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유머 감각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헤론 씨의 모든 곡에 걸쳐 드러나는 특성이 아닐까 해요. 레이건에 대한 곡인 “B Movie”처럼요.
물론입니다. 유머 감각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요. 유머 감각을 잃어보세요. 그럼 인간성마저 잃는 겁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들과 저를 연결시켜 주는 게 바로 유머감각입니다. 딕 그레고리나 리처드 프라이어처럼 예술과 희극을, 또한 희극을 예술과 뒤섞는 분들 말입니다. 이들은 예술에서 주안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또 예술에서 발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요. 이 때 유머가 그 토대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얘기를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이 잘못 되었는지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잘 겪어내기 위해서는 유머 감각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감옥에 갇히셨을 때도 정말로 중요한 부분이었겠네요.
글쎄, 그렇다고 봐야겠죠. 제 인생 전부에 걸쳐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감옥이 아니라 어디서든 그래요. 저는 20달러어치의 코카인을 소지한 죄로 감옥에 갔어요. 제가 어디든 서구 국가에 있는 게 맞는다면, 그저 사회봉사 명령이나 벌금형이나 범칙금을 끊는 것으로 끝났어야지요.
그래서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감옥 생활에서 어떤 교훈을 얻으셨나요?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글도 많이 썼고요. 공부를 많이 했고 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많이 가졌죠. 공연 투어를 가려면 먼저 범죄 사실을 진술해야 했고, 그 사람들이 유럽으로 공연 투어는 보내줍디다만 갔다 와서는 그 사람들에게 보고를 해야 했어요.
감옥에 계셨을 때 이런 사람은 없었습니까? 가령 “이봐! 당신 길 스캇 헤론이잖아. ‘The Bottle’ 부른 사람. 마약 소지죄로 갇히다니 여기서 뭐하는 거야?” 이렇게요.
사람들이 감옥에서 뭐하냐고 물어봤고 저는 그때마다 그만해 달라고 했어요. 20달러어치 코카인을 가졌다고 해서 다음에 헤로인을 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보세요. 이런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 다 보면요. 중독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언제 했느냐 또 무엇을 했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요? 마리화나 피세요?
네
중독되던가요?
아니요. 아직은.
거봐요. 같은 얘기입니다. 마리화나 좀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감옥에 갇히던 시절도 있었어요. 그래서 제 말씀은 제가 단지 중독될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된 거라는 얘기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저라서 그랬겠지요.
(2015/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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