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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영화 리스트 - 1

Baron Samdi 2016. 6. 29. 10:41


1. 퓨리

2차대전의 전차전을 주제로, 그것도 스케일 모델러라면 한 번쯤 만들어보았을 인기 많은 셔먼을 소재로 한 영화인데 고증 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스토리 전개가 너무나도 뻔해서 그저 오락영화의 용도 외에는 영화 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는 힘들 것 같다. 그저 스티븐 스필버그나 톰 행크스가 제작한 HBO 미드의 에피소드 한 두 개 정도의 분량을 합쳐 놓은 것 같다. 다만 브래드 피트, 샤이어 라보프, 로건 레먼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했는데, 혹자는 이를 두고 말에서 전차로 갈아 탄 <가을의 전설> 같다고 평했다. 볼 때는 재미있지만 보고나서 남는 것은 없다. 오로지 전쟁 영화 팬에게만 추천
(★★★)

2. L. A. 컨피덴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잘 이해를 못했었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이 영화만큼 내 취향에 부합하는 영화가 거의 없다. 이 영화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컴퓨터 게임 L.A 느와르가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다시 보게 되었는데, 느와르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긴장을 풀 수 없을 만큼 재미있다. 불행히도 이 영화의 감독인 커티스 핸슨은 이 영화에 모든 공력을 소진한 것 같다. 그 이후에 필모그래피에는 에미넴의 인기를 등에 업은 <8마일> 외에는 인상적인 영화가 없으니까 말이다.
(★★★★★)


3. 킹덤 오브 헤븐

항시 즐겨 찾고 있는 전쟁사 블로그의 추천으로 보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실망스러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살라딘에 대한 후한 평가나 십자군 전쟁의 고증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영화적인 재미도 찾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영화가 역사극으로서 뛰어난 작품은 아니라고 본다. 많은 사람들의 상찬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인정받을 만한 수준의 작품은 아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재능 (심지어 광고에서도)을 보인 리들리 스콧의 아킬레스 건은 아무래도 역사극이 아닐까 싶다. 그 이유는 역사적 배경이 인물들에 녹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물과 배경이 물과 기름처럼 엉기어 있기 때문이다. 기사 발리앙의 영웅담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굳이 십자군 전쟁이 아니어도 좋다. 이 영화로는 굳이 왜 십자군 전쟁이 배경이 되어야 하는지를 내게 납득시키지 못한 것 같다.
(★★★)


4. 할복

<괴담>으로 서구에서도 널리 알려진 거장 고바야시 마사키의 또 다른 걸작. 도쿠가와 막부 수립 후 주군을 잃고 경제적으로 곤궁해진 사무라이(로닌)들이 다이묘의 집을 방문에 무사의 명예를 위해 할복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렇게 되면 다이묘 집안에서는 체면이 상한다 하여 은전을 베푸는데, ‘붉은 귀신’ 이이 나오마사 가문은 사무라이의 명예를 지키라며 할복을 권한다. 어느 날 낡은 행색의 로닌이 이이 가문을 찾아오고 할복에 앞서 들어보라며 자기 얘기를 꺼낸다. 이 영화를 보면 넓게는, 어찌 보면 실정법과 자연법의 충돌을, 조금 협소하게 보면 사회적으로 강제되어 있는 인습과 이러한 인습주의적 태도를 타파하려는 시도들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액션 신이 많지 않지만 두 배우, 나카다이 다츠야와 미쿠니 렌타로가 주동인물과 반동인물 간의 첨예한 대립을 뛰어난 연기로써 잘 형상화한 것 같다.
(★★★★★)

5. 지금 보면 안 돼

굉장히 독특한 형식의 호러 영화이다. 니콜라스 뢰그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이다. 딸을 잃은 영국의 고전미술 복원 전문가가 이탈리아 베니스에 와서 작업하면서 겪게 되는 기이한 일들을 다루고 있다. 반전이 돋보이는 충격적인 결말도 그렇지만, 이 영화가 돋보이는 이유는 스타일이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굉장히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70년대 영화 특유의 따스한 색감이 자아내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은 평가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

6.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

30분쯤 보다 포기할 뻔 했는데 카우츠키, 베벨, 베른슈타인의 등장으로 점점 재미있어지더니 1시간쯤 지나서는 자세를 고쳐 앉아서 봤다. 역시 극을 완성시키는 것은 갈등이려니. 루이제 카우츠키나 요기헤스에게 보낸 서신처럼 로자의 개인적인 자료들도 꽤 남아있는 데다가 감독이 각본가 출신이어서인지 완성도도 높은 편이다. 원래 성격이 쉽게 드러나는 인물로서 음악가, 화가 같은 예술가 혹은 구체적인 사건들에 개입해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기자 같은 직업군과는 달리 사상가는 영화에서 다루기에 까다로운 주제임은 틀림없다. 감독은 로자가 식사 중이나 집회 밖에서 갈등을 빚고 인물들과 언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는데 내게는 굉장히 흥미로운 방식이었다. 예컨대 사민당 파티에서 베른슈타인이 인사를 건네자 대놓고 면박을 준다든가, 이런 장면들이 그렇다. 종반부로 달려가면서 전쟁공채 찬성에 좌절하는 모습, 끝으로 죽기 전에 칼 리프크네히트에게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작은 것만 바라고 살 수도 있건만 하고 한탄하는 모습을 통해서 혁명가로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로자를 잘 그려냈다고 본다. 다만 엔딩장면에서 그 비극적인 죽음을 다룰 때의 연출력은 좀 부족해보였다. 극영화는 가 아니기에 담담한 묘사를 통해 비극성을 부각시키려는 감독의 의도는 알겠지만, 이를 제대로 드러내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그리고 내용이 너무 압축적이어서 로자의 생애를 전혀 모른다면 이해 못할 장면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난삽해 보이는 소재를 하나의 주제로 집약해내는 데 실패했다면 그게 죄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난삽한 소재를 난삽하게 다뤄야 문제다. 일례로 다큐 <요리인류>같은 것이 루카치가 플로베르를 비판할 때 언급했던 사실의 무분별한 나열이라는 악덕을 갖춘 것일 테다. 어쨌든 로자 룩셈부르크의 저작을 읽기 전에, 혹은 읽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볼만한 영화. 그리고 이 영화의 감독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가 2010년에 아이히만 재판을 소재로 <한나 아렌트>라는 영화를 연출했는데, 이 영화의 주연이 또한 로자 역할을 맡았던 바바라 수코바다. 배우 한 사람이 어느 영화에서는 혁명가 역할을, 또 다른 영화에서는 냉전 투사를 연기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

7.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굉장히 압축적이어서 두 번은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스파이 영화. 일반적인 스파이 영화와 이 영화의 차이는 애니메이션 판 <배트맨>과 <다크 나이트>의 차이나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탁월함은 특유의 사실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아무래도 원작자가 존 르 카레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예컨대 영국 정보원이 살해당하고 이를 파견한 정보부 고위 인사들이 정보부에 대해 예산을 할당하는 차관급 인사를 만나는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에서 이들은 애국심이라든가 복수심의 발로가 아니라, 여론 악화와 정보부에 할당될 예산을 걱정하며 이를 수습하기 위해 논의를 한다. 이런 점들이 여타의 스파이 영화들과 구별되는 지점인 것 같다. 이런 점이야 영화보다는 원작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영화 자체도 ‘천의무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주고 있으니, 광고나 영화, 영상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또한 한 번쯤 볼 만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영국 정보부의 핵심 인사가 스파이 행위를 하다 발각되자 소련으로 도망한 사건, 즉 킴 필비와 케임브리지 5인조 사건이라는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존 르 카레 또한 영국 정보부에 재직하다, 이 사건을 통해 옷을 벗게 되었다는데 이를 뛰어난 소설로 남기게 되었고 또 좋은 감독을 만나 영화화되었다.
(★★★★)

 

(201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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