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아이 출생 이후 육아로 인해 영화 볼 시간이 없다. 이 영화들은 모두 보고 난지 거의 몇 달이 넘은 것들이라 적으려니 기억도 가물가물하네.
9. 암살단
앨런 J. 파큘라 감독의 편집증paranoia 3부작 중 두번째에 해당하는 영화. 물론 파라노이아, 즉 편집증, 피해망상증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아마도 우파 계열의 비평가들임이 분명하다. 이 영화들이야말로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사의 엄연한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중 첫번째 영화가 <클루트>이고, 세번째가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소재로 3부작 중 가장 유명한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다. 그 중 나는 이 <암살단>이 오락성과 작품성이 잘 균형을 이룬 수작이라고 본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만 실제 사건을 다루었고, 나머지 둘은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만 얻었다. 어쨌는 세 영화 모두 채퍼퀴딕 스캔들,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 암살, 처치 위원회 보고서 등 미국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는 미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시대적 배경으로 해서 있었음직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 엔딩 신이 매우 인상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현대사, 냉전 첩보물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좋아할 영화.
10.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섬마을을 배경으로 끔찍한 사건을 다룬 영화이고, <서바이벌 게임>이나 <어둠의 표적>의 한국적 변용이랄 수 있겠는데, 배경만 그럴 뿐 주인공은 또 시드니 셸던 소설에 나올 법한 기구한 운명을 가진 여인이다. 소위 시골을 낭만적이고 목가적으로 그리는 데에 대한 반발은 늘 있어왔지만 이 영화는 잔혹극의 요소를 더욱 가미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사실 잔혹극이란 사회의 윤리적 가치를 역설적으로 제시하는 변형된 도덕극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에피소드는 사회의 불합리를 외면하는 사람이 다시 그러한 불합리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는 도덕극적 외연 또한 띠고 있다. 매우 재미있는 영화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찜찜한 구석이 있다. 소위 '촌'이라는 장소가 정치, 경제적 폭력(수탈 등)의 대상에 이어 이제는 문화적 폭력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리고 이러한 시골에 대한 선입견은 도촌 간의 절연이 심화될수록 더 폭력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등이 머리 속을 괴롭혔다. 물론 귀농한 사람들이 시골에서 겪은 일을 올려놓은 글들을 보면 얼마간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주연인 서영희는 물론이고 맹꽁이 잎을 씹는 배성우의 연기가 인상적인 영화. 심장 약하신 분들은 보지 마시길.
11. 불신지옥
이용주 감독은 <건축학 개론>에서 90년대 캠퍼스 생활의 전형적인 인물들을 창조하면서, 그 당시를 함께 거쳐온 관객들의 회고적인 반향을 통해 흥행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는데, 내가 볼 때 그의 진정 숨은 걸작은 이 영화다. 이용주 감독은 또한 탁월한 호러물 감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제발 이 영화가 그의 원 히트 원더가 안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현대판 신파극도 잘 찍지만, 이런 영화를 많이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12. 곡성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는 너무 뻔한 스토리라인을 갖고 있는 것 같아 그리 재미있게 보지 않았고, <황해>는 보지 못했다. <곡성>은 하도 무섭다는 곡성이 많이 들려와서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나홍진 감독의 세 작품을 모아 보니 내가 볼 때 "동북아 3부작"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이번에는 한일관계의 은유가 많이 읽히는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감독이 작심하고 이번 영화는 <추격자>의 엉성함을 쇄신하여 괄목상대할 영화를 만들어낸 것 같다. 특히 서너 개의 내러티브가 나중에 한 지점으로 모여 폭발력을 배가하는 스토리텔링 솜씨가 탁월했다고 본다. 아쉬운 점은 곽도원을 비롯한 몇몇 배우들의 어색한 사투리 연기. 연규진이나 박원숙의 사투리 연기처럼 목불인견 수준은 아니었지만 영화의 몰입을 깨기에는 충분히 나쁜 연기였다. 과연 악다구니 잘 쓰는 것만이 좋은 연기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작 기간도 길었다고 들었는데......
13. 힐즈 아이즈
웨스 크레이븐의 원작은 구하기가 힘들어서 리메이크 작을 보았는데, 감독의 원작의 팬이라서 그런지 리메이크 작도 꽤 괜찮다고 들었다. 그래도 사회적 약자를 가해자로 만든다는 것은 마음 편히 보기에 힘든 요소임에 분명하다. 그래도 잘 만든 고어 호러물. 게임 <폴아웃>과 공명하는 부분이 많다.
14. 론 서바이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미군 특수부대원이 고립되었다 살아남는다는 내용만 보면 <블랙호크 다운>하고도 비슷하겠지만 나는 이 영화가 앞서 말한 <힐즈 아이즈>와 더 유사한 것 같다. 누가 그들을 괴물로 만들었나, 하는 문제를 파고들면 그렇다. 원래 이런 중앙아시아의 극단적 이슬람 세력을 키워낸 것은 다름아닌 미국이었다. 그것도 CIA 같이 첩보물이나 음모론에 자주 등장하는 음험한 조직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명백한 미국 외교정책의 일부였다. 즉 과격한 종교세력을 지원해서 그들이 혐오하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자들에 맞서는 것을 그 목적으로, 이슬람 세력에게 군사 훈련과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이 월남전에서 입은 만큼의 손실을 소련에게도 되돌려주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런 지원을 배경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세력이 탈레반이다. 옛날 유럽 귀족에게 유전병으로 기형이 된 아이가 생기면 다락방에 가둬놓고 키웠는데, 이런 다락방의 아이들이 바로 탈레반, 오사마 빈 라덴, IS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정책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탈냉전기 미국 외교 정책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방기하고 영화를 보면 이 영화는 미국지상주의의 선전물이 될 수 밖에 없다. 특히 이 영화처럼 재미있게 잘 만들어진 전투물일 경우, 사건의 원인보다는 과정에 매몰되어 일면적인 시각을 갖기 쉽다. 매우 잘 만든 영화가 가장 나쁜 프로파간다 필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15. 신세계
스토리 자체는 비현실적인데, 이를 현실적이도록 만드는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이는 영화. 찰진 대사빨은 물론이고, 연기들이 다 잘 세공된 작품을 보는 것 같다. 굉장히 뛰어난 한국식 느와르다. 오락영화 면에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영화 중에 하나가 아닐까. 역시 어색한 연변 사투리가 거슬린다.
16. 재키 브라운
단순한 블랙스플로이테이션에 대한 오마주를 넘어, 퀜틴 타란티노의 감수성이 잘 살아난 영화. 음악은 내 취향이었지만 영화는 약간 지루했다.
17. 비련의 110번가
수비수 두세명을 제치고 스루 패스를 넣어주니 스트라이커가 X볼을 찬 듯한 영화. 촬영이나 편집부터가 기본이 안된, 마치 70년대 국내방화 같다. 바비 워맥의 탁월한 주제곡과 멋진 인트로까지만 쓸 만하다.
18.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
참신한 배경과 소재를 가지고 있지만, 조쉬 하트넷이 아까운 영화.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긴장이 고조되다가 후반이 되면 김이 새버린다. 흡혈귀 물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시청을 권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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