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붉은 10월
독특한 소재를 다룬 냉전 스릴러. 해리슨 포드가 잭 라이언 역할을 맡은 <패트리어트 게임>이나 <긴급 명령>보다 대중성은 좀 떨어질 수는 있어도, 오히려 <붉은 10월>이 작가로서 톰 클랜시을 더욱 크게 드러내는 작품인 것 같다. 특히 잠수함과 해전에 대한 치밀한 묘사와 함께 미국과 소련의 권모술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화끈한 액션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2시간이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은근하게 일어나는 심리전이라든지, 냉전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좋아할 것이라 믿는다. 톰 클랜시는 보수주의자이며 공화당 지지자이기는 하지만 소련을 지구정복을 위해 날뛰는 순수 악으로 규정하는 유치찬란한 냉전 반공물과는 다르게 실재하는 적으로서 소련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의도를 미국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이런 점이 톰 클랜시의 뛰어난 점이라 하겠다. 톰 클랜시의 문제는 그의 소설과 영화에서 적으로 묘사되는 아일랜드, 쿠바, 소련이 왜 미국을 적대하는가에 대해 사고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보험중개인으로 출발해 백악관까지 입성한 성공한 밀덕후에게 이런 성찰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우리가 톰 클랜시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순수한 재미와 결합된 현실에 대한 세밀하고도 적나라한 묘사이지, 이념이나 현실에 대한 성찰은 아닐 테니까.
27. 엘리펀트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컬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의 엄마가 쓴 수기를 충격적으로 읽고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이 영화를 알게 되었다. TV용 영화로 제작되어 칸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고 유명 평론가 정 모씨의 극찬을 받았다는 영화라고 한다. (나는 이분이 영화를 보는 눈이 특별히 높거나 잘 만드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영화와 일견 관계없어 보이는 현학적인 개념들을 영화 내용에 잘 연결짓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있게 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화가 어떤 큰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 그리고 그 표현방식이 독창적인가, 하는 문제에는 의문 부호를 달고 싶다. 이 영화가 아무런 관계 없는 '엘리펀트'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유는 '방안의 코끼리'라는 모두가 알면서도 누구도 해결하려 하지 않는 문제를 뜻하는 관용어구에서 나왔기도 하고 영화에서도 잘 표현되었듯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구체적인 현실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각 등장인물의 시선 높이에서 그들이 하는 행동을 롱 테이크로 따라가면서 시공간을 나누어 서로 간의 행동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이와 비슷한 구성이기는 하지만 내가 볼 때, 이 영화의 구성은 그런 나열식은 아니고 오히려 에롤 모리스의 걸작 다큐 <가늘고 푸른 선>과 더 유사하다. 이 영화의 약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에롤 모리스의 다큐에 나오는 살인 사건을 총기 난사 사건으로 바꿔놓은 것뿐, 영화에서 감독의 어떠한 새로운 성찰도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인물의 시선 높이에서 조용히 관찰자의 시선으로 따라가는 기법이 이 사건을 지켜보는 우리들의 무력감을 증폭시키기 위한 장치임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 인물간의 상호 교차하는 행동에 약간의 오차들이 눈에 보인다는 점을 더 지적하고 싶다. 당연히 원 테이크가 아니라 각 인물의 시점에서 테이크를 나누었겠지만 현장에서 즉흥적인 판단에 따랐기 때문인지 감독이 꼼꼼하지 못했던 탓인지 편집과정에서 실수가 눈에 띄었다. 예컨대 동일한 시선 내에 있어야 할 인물이 다른 인물의 시선 내에서는 사라져 있다든지. 어떤 성찰을 안겨주고 큰 상을 받고 유명 평론가가 걸작이라 칭송했다고 해도 나의 개인적인 미적 기준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하는 영화다. 설령 보는 동안만큼은 재미있게 봤다 하더라도.
28. 브루노
사샤 바론 코헨의 코미디는 볼 때마다 힘겹다. 하지만 엄청난 저질 코미디와 사회 문제에 대한 통찰과 문제 제기가 혼효되어 <잭애스>처럼 한바탕 웃고 끝낼 게 아니라 두고두고 내용을 곱씹게 만든다. 저질 코미디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대단하다. 관객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가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위선의 가면을 벗기는 데도 큰 위력을 발휘한다. 마치 토마스 만의 단편 <마리오와 마술사>에 나오는 마술사 치폴라처럼 가학적인 재미로 관객들을 놀라게 하고, 민망하게 하고, 궁지로 밀어넣는다. 게이 패션 리포터 연기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보랏>에서 반유대주의자를 연기해 반유대주의를 고발하듯이, 이번에는 게이를 연기하면서 사회에 만연한 동성애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폭로한다. 사샤 바론 코헨이 의도하는 목표는 바로 사람들의 위선이다. "정말 이런 것까지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하는 태도로 영상을 극한으로 몰고간다. 그래서 이런 영화도 용인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 사회에서 관용을 말하겠는가, 하는 중대한 의문을 던진다.
29. 피의 삐에로 (IT)
광대 공포증을 유발하는 영화. 원작 소설을 예전에 읽어둔 적이 있는데 당시는 굉장히 무서운 분위기로 서두를 시작하다 이상한 코스믹 호러에 청소년 성장 드라마에 이야기가 삼천포로 가는 바람에 긴 소설을 읽으면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끝까지 재미있게 읽었지만. 무엇이 되었든 '그것'으로 불려도 무방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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