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용서받지 못한 자 (2005) ****
15년 전의 영화인데 방화의 미덕을 갖춘 영화다. 고루한 롱 테이크 투샷은 학생영화여서가 아니라, 감독의 의도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여러 샷에서 촬영의 미숙함이 너무도 엿보인다. 공들여찍은 부분은 좋았지만 여전히 고루함을 피하기는 힘들다. 다만 한국 남성의 보편적 트라우마를 건드린 영화였기 때문에 이 영화는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주제의식을 선정함에서 영리함이 돋보였던 영화. 그리고 감독의 고문관 연기가 너무도 리얼했다.
12. 레스큐 던 (2006) ****
적진에 떨어진 조종사가 적의 위협을 물리치고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다는 똑같은 얘기를 두고 누구는 <에너미 라인스>를 만들고 누구는 <레스큐 던>을 만든다. 그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에너미 라인스>의 상처가 남아있지만 베르너 헤어초크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감독이기 때문에 믿고 볼 수 있었다. 최근 <잭 리처>를 봤을 때, 악역으로 출연해서 인상적인 연기를 해서 매우 놀란 기억이 있다. 이 영화는 <아귀레, 신의 분노>를 여러 모로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투쟁 사이에 놓인 극한적인 상태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헤어초크 영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 새디스트 감독과 매저키스트 배우들이 어우려져 만든 숨은 명화.
13. 약장수 (2015) ****
한국판 <조커>라고 해서 속아서 본 영화. 하지만 한국 배경으로 <조커>을 만든다면 이런 영화가 될 법 하다. 특히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신은 마쓰모토 세이초를 연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주제의식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카게무샤>와도 유사하다. 예컨대 인물의 신분과 성격의 전도된 형태를 통해서 특정한 가치를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이 그렇다. <카게무샤>에서 그것이 '충'이라면 <약장수>에서는 '효'다. 검사 아들보다 실질적인 효를 행하는 자는 누구인가. 노인 등치는 홍보관의 뜨내기 직원이다. 돈을 위해 맺어진 관계지만 혈연보다 끈끈하다. 자주 안부를 묻고 노래를 불러주고 기쁘게 해주는 실질적인 자식에게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는 아이러니는 일종의 가족제도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근자의 한국영화나 드라마가 현실은 고려하지 않고 작가의 망상을 영상화하는 데 급급한 현실에서 이런 영화는 가뭄의 단비 같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인물의 고통은 개인적 결함과 사회적 요인들이 교합하여 배가되는 것이며, 인간이 아무리 선량하다 하더라도 비정한 자본주의의 강력한 물질적 힘에 굴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안겨 준다. 일일 드라마보다 나을 것 없는 연출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스토리의 강력한 힘이 있다. <거칠마루>의 뒤를 잇는 한국 리얼리즘의 쾌거.
14. 컨버세이션 (1974) ***
코로나 자가격리 기간에 텅빈 방안에서 색소폰을 부는 진 해크먼의 모습이 해외 SNS에 올라오고 있다. 영화 전체의 정조는 고독이고 그런 고독을 형상화하기 위한 장치로는 도청과 재즈 만한 게 없다. 나는 이 영화가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 관계의 왜곡, 서로가 먹이사슬을 이루는 기형적인 관계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저 지루한 영화였던 기억밖에 없지만 이제 와서 보면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당시는 그런 고독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주제로 만들어진 영화 중에 더욱 탁월한 영화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15. 포드 V 페라리 (2019) ****
일종의 버디 무비 형식을 띤 레이싱 영화. 원래 차에 관심이 없고 더군다나 레이싱에 크게 관심이 없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봤다. 나름 기업 비사나 개발사 같은 것도 좋아하기 때문에 대기업 포드와 장인 정신의 페라리가 대결하는 소재도 내가 좋아하는 요소 중 하나다. 기업사는 현대의 군담 소설이다. 사람들이 기업을 근대적 합리성의 산물인 듯 오해를 하지만 전적으로 봉건적 유제의 소산이다. 가문과 가문의 대결, 암투와 권모술수 만큼 인간의 음험한 이면을 자극하는 요소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 영화는 아무 생각 없이 밝게 그려내고 있고 오락 영화로서는 이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크리스천 베일이 영국 액센트 흉내 잘 낸다, 연기 참 잘 한다고 생각하며 프로필을 보니 영국 국적이었던 것이 새삼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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