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챕터는 제임스 브라운이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곡들을 발표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여기서 저는 개인적으로 제임스 브라운이 일종의 정치적 각성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은 그다지 옳은 견해가 아니라고 봅니다. 제임스 브라운의 이러한 곡들은 빈센트가 보는 바와 같이 흑인 민중에 대한 애착의 발로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그의 기민한 비즈니스 감각도 일정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크게 소리쳐라!
1968년 무더운 여름 내내 제임스 브라운과 그의 밴드는 캘리포니아에서 투어를 돌고 있었다. 그는 아직은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노래를 쓰지는 않았지만, 이전보다 더 강경한 정치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킹 목사의 죽음에 이어 6월의 인기있는 대통령 후보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암살 그리고 오클랜드에서 FBI가 전방위 공세를 벌여 흑표범 당원들을 살해하고 체포하는 사건이 흑인들을 심정적으로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1968년 6월 브라운은 감상적인 “America Is My Home”을 녹음했고 베트남에서 콘서트 투어를 열었는데, 이 행동으로 미국의 반전 행동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7월에 그가 베트남에서 돌아올 즈음, 그는 또 다른 재기작을 발표할 필요을 느꼈는데, 이는 그가 곧 정치적으로 보다 아래쪽을 지향하게 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의 밴드 연주자였던 행크 발라드Hank Ballard에 따르면, “기관총을 휴대한 흑표범 당원들Machinegun Toting Black Panthers”이 그를 겁박해 음악적인 면에서 흑인 해방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취하도록 했기에 그의 밴드는 곧 나무랄 데 없이 사회적 의식으로 가득 찬 곡 "Blackenized", “How You Gonna Get Respect (When You Haven't Cut Your Process Yet" 그리고 넘버 원 히트곡 "Say It Loud (I'm Black and I'm Proud)"를 발표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느 누구도 제임스 브라운을 협박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시대의 흐름은 점점 더 심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브라운의 이러한 곡들을 발표함으로써 나타난 결과는 어쩌면 킹 목사와 말콤 엑스가 사망한 이후, 흑인 민족에게 가장 큰 충격을 가져다 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Say It Loud”는 흑인 음악의 전환점이었다. 그 이전의 어떠한 흑인 대중음악도 노골적으로 백인들에 대해 흑인들의 환멸을 시사한 적이 없었기에, 이 곡이야말로 훵크가 흉폭함을 드러낸 사건이었던 것이다. 빌리 할러데이Billie Holiday의 "Strange Fruit"과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Alabama"가 인종차별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었고, 마사 앤 더 밴덜라스Martha and the Vandellas의 “Dancing in the Streets”가 저항에 대한 요구를 상징화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Say It Loud"처럼 제임스 브라운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직접적 행동”에 대한 요청은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요구한다.
벽에 머리를 짓찧는 일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노동을 바치는 일도
이제는 질려버렸다.
우리는 민중이다. 새떼나 벌떼와 같을지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두 발로 서서 죽겠다.
크게 외쳐라! 나는 흑인이고 그래서 자랑스럽다!
- 제임스 브라운, "Say It Loud (I'm Black and I'm Proud)"(1968)
(200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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