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갚음
반면 1973년까지 브라운의 개인적 삶은 이미 붕괴되고 있었다. 그는 음악 외적인 압박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는데, 6월에는 사랑하는 아들 테디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데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닉슨을 지지하게 되었으며, 국세청the IRS로부터는 450만 달러의 세금을 포탈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훗날 밝혀진 국세청이 브라운에게 행한 표적 세무 조사는 불법이었지만 그 당시의 브라운에게는 별반 도움이 못되었다.) 브라운은 두 영화(<흑인 시저Black Caesar>와 <도살자의 대사기극Slaughter's Big Rip Off>)의 음악을 맡았는데, 넘버 원 히트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많은 속편들이 제작되었다. 제이비스가 두 번째 앨범 <Doin' it to Death>는 “프레드 웨슬리 앤드 더 제이비스”의 이름으로 발매가 되기는 했어도 그 해의 최고의 판매고를 올린 제임스 브라운의 앨범이었다. 스티비 원더나 마빈 게이, 혹은 제임스 브라운의 훵크를 사용하는 여타의 뮤지션들이 눈에 띠게 성공을 거둔 반면, 대부는 방송도 타지 못한 채 점차 스포트라이트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제임스 브라운은 그 해 세 번째 영화의 음악을 맡기로 계약하고 나서, (<흑인 시저>를 감독했던) 래리 코헨Larry Cohen과 웨슬리, 메이시오, 지미 놀렌 등의 도움으로 그의 가장 강력한 작품, “앙갚음The Payback"을 녹음했다. 웨슬리는 그 특별한 작품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건 아주 급작스러운 일이었지요. 역동적인 기타 사운드는 제임스 브라운의 콧노래에 맞춰서 지미 놀렌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 유명한 관악기 리프들은 사실 음조에서는 어긋난 것들이었어요. 그리고 제임스 브라운은 제가 써온 가사를 찢어버렸죠. 그의 보컬은 완전히 즉흥적이었어요. 그런데 (드러머) 자보 스탁스는 모든 것에 먹혀들만한 강력한 비트를 연주해냈어요. 우리가 녹음을 끝났을 때, 엔지니어가 리믹스를 해보자고 하더군요. 그러자 브라운이 소리를 질렀어요. “그거 손대지 마!”
웨슬리가 타이틀 트랙을 (감독인) 코헨에게 가져가자, 코헨은 놀랍게도 그 사운드트랙을 거부하면서 프레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야! 이건 좀 덜 훵키한 것 같아, 자기야, 나는 좀 더 제임스 브라운적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제임스 브라운은 즉시 그것을 자신의 정규 음반으로 발매했고, “The Payback"은 바로 넘버 원 히트를 기록했다. 이 당시가 브라운의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정치적 성향 때문에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감독 코헨으로부터 거절당한 데다(브라운도 어쩔 수 없이 자기 뜻대로 내리지 못한 의사 결정이 몇 있었다.) 그의 흑인 음악 동료들로부터 버림받자, 그 설움은 모두 사악한 기타와 과격한 드럼 그리고 그의 전매특허인 외마디 소리로 나타났다. “나는 미쳤다!I'm mad!”
그러던 중, 프레드 웨슬리와 메이시오 파커는 제이비스 사운드를 보다 강력한 화력을 지닌 소울풀하고 확고한 훵크의 저장고로 발전시켰다. 능글맞고 민활하면서, 노골적이며 더럽게, 그럼으로써 제이비스는 흑인 소울 리듬의 화신이 되었으며, 제이비스의 파생 프로젝트spinoff project인 프레드 웨슬리 앤드 더 제이비스, 메이시오 앤드 더 맥스Maceo and the Macks, 뿐만 아니라 가수인 바비 버드, 린 콜린즈Lyn Collins, 마바 위트니Marva Whitney 등은 제임스 브라운의 제국 - 당시 그의 밴드의 천재성 - 을 강화해 주었다.
브라운은 <The Payback> 앨범을 내고 1974년에는 뒤이어 더블 앨범인 <Hell>을 냈는데, 이 음반은 사회 비평으로 가득 차 있었고 현재의 고전이자 가장 많이 샘플된 “Papa Don't Take No Mess"의 30분에 걸친 연주가 담겨 있었다. 또한 웨슬리의 독특한 훵크 리듬 편곡이 가미된 또 다른 프로젝트가 1974년에 발표되었는데, 그 것이 곧 <Reality> 앨범으로 재기발랄하면서도 부드럽지만 또한 필요불가결한 70년대 리듬의 사악한 완성작이었다. 그 앨범은 또 다른 스탠다드 훵크인 ”Funky President"와 아트워크나 가사 그리고 레이아웃이 강력한 사회적 의식과 소울 음악의 사명을 보여주었지만, 레코딩의 음질은 끔찍했다. 그 앨범은 마치 ‘모노’로 녹음한 듯이 들렸으며 보다 화려한 70년대 초기의 밴드들, 예를 들어 오하이오 플레이어즈, 아이즐리 브라더스,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 그리고 불굴의 스티비 원더의 날렵한 패키지와 경쟁할 수 없었다.
그 뒤로부터 브라운의 음반들은 다소간 형식적인 리듬에 갇혀버렸고 댄스 싱글은 한두 장 정도만 만들어낼 지경이었다. 작열하는 타이틀 곡 “Get Up Offa That Thing"이 1976년에, “Body Heat”가 1977년에, 그리고 “For Goodness Sakes, Look at Those Cakes”가 1979년에 나왔는데 거의 앨범 판매는 기록하지 못했고, 괴물 같은 댄스 곡 "Nature", "Jam" 그리고 “The Spank"가 제임스 브라운이 1978년 발표한 <Jam/1980s>에서 싱글 커트 되었지만 조용히 묻혀버렸다. 앨범 포맷은 제임스 브라운이 바란 대로 나오지 않았고, 대신 그의 수많은 모방자들이 70년대의 십년 동안 팝 스타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많은 훵크 아티스트들이 제임스 브라운의 훵크 사운드에 충실했으며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다들 한 밑천을 잡은 반면, 브라운은 때때로 소울 차트에는 올랐지만 팝 차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1975년의 "Dead On It"의 잼 세션의 간주곡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을 반박한다.
이제 우리가 이 세션을 끝낼 때쯤이면, 사람들은 훵크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게 될 겁니다 볼 때마다, 라디오를 들을 때마다. 나는 제이비스를 듣고, 제임스 브라운을 들어요. “이런 세상에, 좋은데?”라고 말하기는 그렇겠지만 뭐 괜찮아요. 난 상관 안 해요. 사람들이 내게 무슨 로열티를 지불한 것도 아니고 다른 쇼에 나와서는 “이봐, 내가 이걸 다 혼자서 만들어냈단 말이야.”라고 말합니다. 제임스 브라운을 들어보세요. 그들이 제게 물어봐야 할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나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요. 왜냐하면 내가 크게 소리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걸 계속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70년대 댄스 음악에 일어난 많은 변화로 인해, 제임스 브라운 사운드는 P-훵크의 영향을 받은 후기 댄스 음악에 대한 가공되지 않은 원초적인 선구자 역할 정도로 화석화되었다. 제임스 브라운은 언더그라운드로 내려앉았고, 60년대 열정적인 흑인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인물 정도로 취급받았다. 그는 70년대 영화 <닥터 디트로이트>와 <블루스 브라더스>에 출연했지만 영화 <록키 4>에 삽입된 싱글 “Living in America”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기록할 때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가 1950년대 이후로 꾸준히 앨범을 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었다.
(200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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