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Funk> 2-21 - 제임스 브라운 밴드 Pt. 2

Baron Samdi 2016. 6. 24. 14:27

1971년 봄 (콜린즈 형제가 탈퇴한 뒤) 프레드 웨슬리는 지체 없이, 그들을 대체할 인물을 찾았다. 밴드는 그들의 탈퇴를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 “새로운” 제이비스는 다시 지미 놀렌의 기타와 프레드 토마스의 베이스가 추가해 많은 솔로 앨범들을 녹음했는데, 이 앨범들이 나중에 랩 음악의 주요한 샘플이 된다. 1972년 첫 번째 제이비스의 앨범은 “Food For Thought", 루핑에 많이 활용되었던 "Pass the Peas", "The Grunt", "Gimme Some More" 그리고 "Escapism"이 수록된다. 이 모든 곡들은 연주곡으로 이따금 제임스 브라운의 즉흥적인 보컬과 리듬 섹션에서의 복잡하고 활기찬 그루브로 이루어졌다. 웨슬리와 메이시오 파커는 훵크 관악 솔로에서 새롭고 환상적인 스타일을 선보이는 주요한 연주자였고, 그들이 만들어낸 리듬의 스윙은 주로 솔로에서 즉흥적인 멜로디와 사악하고 강렬한 연주를 보여주었다.


제임스 브라운 자신의 주제가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동명의 1972년 더블 앨범에서 웨슬리는 본질적이고, 폴리리듬적인 훵크 걸작 "Get on the Good Foot"을 편곡했다. 그것은 제임스 브라운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나타난 훵크 비법이었다. 웨슬리는 잼을 강조했는데, 그 이유는 “(그 곡에 속한) 어떤 파트도 동일하게 연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독특한 능력으로 제임스 브라운의 생각으로부터 음악을 이끌어내어 우리에게 알려진 형태의 훵크로 아주 견고하게 만들어냈다. “그(제임스 브라운)가 내 머리 속에 훵크를 흘려보내줬어요. 각 부분을 제게 콧노래로 불러주면, 저는 그걸 조합해서 곡이 되도록 만들었죠... 내가 새로운 곡을 조합할 때마다 나는 이런 방식을 내가 하는 모든 것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내가 훵크를 좀 하고 싶을 때 말이죠.”
사악하게 교차하는 리듬들이 아래에서, 강력한 빅밴드 양식의 관악기들이 위에서, 그리고 대부의 효과적인 외침들이 입혀짐으로써, 제이비스는 제임스 브라운의 마음, 더 나아가 그가 대표하는 흑인 남성의 영혼을 음악적으로 완벽히 표현해냈다. 1973년 제이비스의 앨범에서 엠시(마이크 체커)를 맡은 대니 레이Danny Ray의 익살스러운 언급은 꽤나 예언적이다.

신사 숙녀 여러분, 세계에는 아주 잘 알려진 7가지 불가사의가 있지요. 이제 여러분은 8번째 불가사의를 보시게 될 겁니다.(드럼이 울리며) 여러분들에게 “The Grunt", "Pass the Peas", "Gimme Some More" 이런 곡들을 들려줄, 공연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서 있는 이 열 두 명의 젊은이들! 신사 숙녀 여러분, 이들이 바로 제이비스입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음악의 세계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아프리카의 밴드 리더들인 펠라 쿠티와 매뉴 디방고Manu Dibango는 제임스 브라운을 듣고부터 음악을 바꿨다. 그리고 (제임스 브라운의 자서전에 따르면) 믹 재거Mick Jagger와 엘비스 프레슬리는 대부의 추종자였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흑인음악이 아주 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그들의 음악이나 관악기의 리프들을 들어보면, 제이비스가 쿨 앤드 더 갱, 타워 오브 파워Tower of Power,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의 실험적인 퓨전 그리고 마일즈 데이비스 등의 빅 밴드 훵크, 맨드릴Mandrill이나 워War와 같은 블랙 록 음악, 그리고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 휴 마사켈라Hugh Masakela 그리고 매뉴 디방고와 같은 아프로-팝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심지어는 아프리카의 가봉의 대통령, 앨버트 봉고Albert Bongo(주.1 참조)는 1975년 그의 취임식에 참석해서 공연하는 데 16만 달러를 지불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임스 브라운의 이미지는 1970년대 중반에는 널리 퍼져 있어서, 1975년 뉴욕에 거주하는 한 “백인”은 레스토랑에 침입해서 많은 인질들을 잡고 흑인들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떠들기 시작하면서 제임스 브라운을 만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잡지 <제트jet>에 따르면 그 백인 인질범은 경찰 관계자에게 “제임스 브라운과 대화를 하게 해주면 인질들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총을 든 인질범은 “제임스 브라운보다 흑인들에게 권위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확실하게 느꼈던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브라운에게 이 소식이 닿았고, 그는 곧 뉴욕으로 갈 채비를 차리게 되었는데, 때마침 그 인질범이 깜빡 잠에 들었고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사건이 묘하게 들리는 까닭은 제임스 브라운이 어떤 흑인 정치가보다도 비중이 있었다는 생각과 여전히 도덕적 권위로써 흑인 민족을 통솔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대로 적중했다는 것이다.

주1. 역자 주 - 후에 이슬람에 귀의하면서 오마르 봉고Omar Bongo로 개명, 한국과의 긴밀한 관계 유지로 기아자동차 <봉고>의 모델이 되었다. 연기자 정 모 씨와의 루머로도 유명.


 

 

(2009/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