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theca

2024년 영화 목록 - 2.

Baron Samdi 2024. 5. 27. 15:20

6. 모래그릇 (1974)

 

노무라 요시타로 감독의 숨겨진 걸작. 마쓰모토 세이초 원작 소설을 영상화한 사례 중에서 가장 걸출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마리오 푸조의 <대부>처럼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 소설을 읽으면, 영화에서 소략된 부가적인 정보와 사건들을 다시 접하면서 더 재미있게 읽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오히려 소설의 산만함을 집약시켜 주제의식을 더 돋보이게 만든다. 도쿄 카마타 조차장에서 얼굴이 짓이겨진 시체가 발견되고, 범인이 도호쿠 사투리를 썼다는 증언을 토대로 발로 뛰며 증거를 확보한다는 원작의 얼개를 살리면서도, 영화에서 살리고 싶은 핵심적인 요소는 놓치지 않았다.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소설과 영화를 함께 보면 좋은 공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만큼이나 뛰어난 음악을 만든 음악감독은 아쿠타가와 야스시로 이와나미 신서판 <음악의 기초>를 저술한 작곡가이자 음악 이론가로 아버지가 그 유명한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다. 원작 소설에서 이마니시 경위가 수사 중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밀감>을 떠올리는 대목을 보면 더욱 흥미로운 인연인 것 같다. 이마니시 경위로 출연한 탄바 테츠로는 정말 <망팔무사도>의 그 사람일까 싶을 정도이고, 지금은 정치인으로 변신해 치바 현 지사를 지낸, 젊은 시절의 모리타 켄사쿠가 그려내는 열정적인 요시무라 형사의 모습도 인상 깊다. 오즈 야스지로의 페르소나 류 치슈가 출연하고, <복수는 나의 것>의 오가타 켄도 다정하고 남을 돕기를 주저하지 않는 인물로 나온다. 후반부가 신파 조로 흐른다는 비난도 있을 수 있겠지만, 소위 신파극은 과장된 연기와 구성으로 관객의 심금을 울리도록 만들어진 반면, 이 영화에서는 오로지 영상과 음악만으로 더 높은 경지의 비극성을 보여준다. 세이초의 세계에는 완벽한 선인도, 완벽한 악인도 없고 그저 비정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들만 있을 뿐이다. 세이초의 원작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기에 세이초 팬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영화다. (★★★★★)

 

 

7. 라이언 일병 구하기 (1998)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본 김에 내처 꺼내봤다. 98년 개봉했을 당시, 고속터미널 자리에 있던, 지금은 없어진 영화관에서, 또 지금은 세상에 없는 친구와 봤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인지 유명한 오마하 상륙 신이나 전투 신만 기억에 남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보니 재발견하게 된다. 스필버그를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명작은 명작이라는 점.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가 초반 30분은 위대했지만 후반부의 스토리는 왜소하기 짝이 없다고 평했다. 나는 그런 평가는 박찬욱 감독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늘 그의 과장된 자의식을 불편하게 느껴왔다. 이 영화를 미국 만세물로 보건, 단선적인 스토리를 따라가는 전쟁영화로 보건, 이 영화가 인간 보편에 호소하는 바가 많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스필버그의 영화가 뻔하다는 괴랄한 시네필들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미국적임'을 드러내는 훌륭한 프로파간다 필름이 될 수도 있지만, 피터 위어의 <갈리폴리>처럼 군 상층부의 관념적인 선택을 하급장교와 병사들이 피와 살을 갈아내면서 구현해 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계급적인 시각을 읽어낼 수 있다. 보면 볼수록 더 포괄적인 계층이 감동하면서 동시에 역사와 인물이 특수하게 얽혀서 충돌하는 지점을 읽어낼 수 있는 영화가 나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감상자의 탓이지, 영화의 탓이 아니다. (★★★★★)

 

8. 눈과 피의 4일 (1989)

일본 황도파 장교들이 '존황토간' 즉, 천황을 받들어 간신들을 토벌한다는 기치 아래 내각 대신들을 죽인 친위 쿠데타 2.26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만약 유럽에서 나치의 '긴 칼의 밤'을 영화화했더라면 어땠을까?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미비할 뿐 아니라 한심한 역사적 사건까지도 미화하는 일본의 태도가 일본 문화의 갈라파고스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일본의 문화적 산물들은 보편성의 획득에서 계속 미끄러지면서 특정한 취향을 지닌 오타쿠들에게만 호소력이 지닌 한정적인 것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폴 슈레이더의 <미시마>처럼 아름다운 영상미와 압축성, 균형을 고루 갖출 수도 있었을 텐데. 버블 시대의 돈 낭비 같은 영화다. (☆)

 

9. 핵소고지 (2017)

태평양 전쟁 때 총을 들지 않고 75명의 목숨을 구한 전설적인 의무병 데즈먼드 도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 최고의 전쟁 영화라는 홍보 문구에 혹해서 봤다. 주말 타임킬링 용 TV영화 내지는 주일학교 상영용으로 좋은 영화다. 전쟁의 비참함을 볼거리로 소비하는 부분도 아쉽다. (★★★)

 

 

10. 낡은 권총 (1979)

1944년 나치 독일 치하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던 외과의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아내와 아이를 시골로 피신시킨다. 나중에 찾아가보니 아내는 나치 무장친위대가 강간하고 화염방사기로 소사시킨 뒤였으며, 아이는 도망치다 총에 맞아 죽은 채로 발견된다. 의사는 성당 옥상에 숨겨놓은 낡은 산탄총을 꺼내고, 미로와 같은 성의 지하를 이용해서 친위대원들을 몰살시킨다.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 등에 모티브를 주었을 법한 프랑스 오락 영화. 이 재미있는 설정을 이상한 연출로 말아먹는다. 중간중간 아내, 아이와 회상 신이 들어가면서 액션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옛날 액션영화 특유의 개연성 없는 연출이 실소를 자아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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