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 맞습니다. 녹음한 이후로는 곡을 못 들어봤다고 하셨잖아요?
나 : 스튜디오 안에서만 들어봤을 뿐이죠. 그런데 클럽에 가니까 다들 제 노래를 아는 것처럼 따라 부르더라고요. 댄스 플로어 위에서 노래를 즐기던 사람들이 제가 누군지 알게 되자마자 공짜 술을 사주었습니다. 그날의 주인공이 된 셈이죠. 우리는 몇몇 인맥을 동원해서 레코드 계약을 맺어보려고 했습니다. “자, 와서 보세요. 이 상황을. 사람들이 우리 음악에 반응을 보이고 있잖아요.” 이렇게요. 이런 일이 매일 밤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Everybody Dance’의 녹음을 마쳤을 때, 이 DJ 친구가 2장을 가져간 게 그 길이가 8분 30초 정도였거든요. 스튜디오에서 듣고 다시 노래를 듣게 되었을 때, 그 친구는 이 곡만 한 시간 넘게 틀고 있었어요. 앞뒤로 돌려가며 틀고 또 틀더라고요. 그런데 그 주의 빌보드 1위곡인 월터 머피의 “베토벤 5번”을 틀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다 “우~~~~”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다시 “Everybody Dance”를 틀어야 했죠. 그 빌보드 1위곡을 틀려면 제 노래를 네다섯 번 더 틀어줘야 했죠.
인 : 그리고 여전히 레코드 계약을 따내지 못한 상태였고요?
나 : 우리는 레코드 계약을 따내지 못했는데도 다음 싱글을 녹음하기 시작했어요. “Dance, Dance, Dance (Yowsah, Yowsah, Yowsah)” 였는데, TV광고 음악 B 사이드 곡으로요. 그 곡 덕에 레코드 계약을 따낼 수 있었어요. 계약 코앞에서 계속 바람맞는 일이 되풀이되니까, 이제 이게 인종차별 때문이구나, 깨닫게 되었어요. 왜냐면 우리가 회의에 들어가면 우리 그룹 중에 백인처럼 보이는 친구에게만 말을 걸었기 때문예요. 그 친구는 사실 푸에르토리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레코드 회사 백인 중역들이 보기에 그 친구는 백인이었던 겁니다. 그래서인지 대놓고 그 친구에게만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 친구가 그랬어요. “이 사람들한테 말씀하시죠. 전 겨우 2주 전에 채용된 멤버란 말입니다. 전 아무 것도 몰라요. 밴드는 이 사람들이 만들었거든요.” 그제야 알게 되었죠. 이 친구가 백인이니까 리더인 줄 알았던 겁니다. 아니면 리더는 당연히 백인이겠지 그렇게 봤던 거겠죠. 결국에 우리는 부다 레코드 (역자 주 – 흑인 소유의 레코드 레이블)에 가서야 ‘쉬크’라는 우리의 소피스토 훵크 콘셉트를 팔 수 있었어요. 당시 계약상에 한 가지 조항이 있었습니다. 빌보드 디스코 컨벤션이 있을 때까지 음반을 내준다는 것이었어요. (역자 주 – 자세히 나와 있지 않으나 다나 서머 관련 기사에 78년 뉴욕 힐튼 호텔에서 디스코 컨벤션 만찬이 있었는데, 빌보드지가 주최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제가 봐도 부다 레코드는 그때 자금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역자 주 – 당시 부다 레코드의 위기는 사장 클레어런스 애번트가 집을 내다 팔아야 할 정도로 심각했다고 한다. 이 자금난은 솔라 레코드 출신의 다이나 앤드루스가 명 프로듀서 듀오 지미 잼 앤드 더 테리 루이스를 영입해 오고 난 뒤에야 해소되었다.) 제때에 음반을 낼 수가 없었죠.
그래서 애틀랜틱 레코드의 회장을 찾아갔어요. (역자 주 – 스택스 레코드의 음반을 배포하던 애틀랜틱은 70년대 들어 흑인음악 섹션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산하에 코틸리온 레코드를 설립했다. 그 일환으로 애틀랜틱도 제리 그린버그 체제로 전환했는데, 이 변화를 이끈 사람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설립자이자 터키계 미국인인 아메트 에르테쥔이다.) 우리는 회장을 목요일에 만났는데, 빌보드 컨벤션은 다음 주 월요일인가, 화요일인가 그랬습니다. 제리 그린버그 회장은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평생의 친구가 되었는데요. 이 분이 프레스 공장을 주말 내내 돌리게 해서 음반을 헬리콥터로 공수해왔어요. 워너 사의 헬리콥터가 (역자 주 – 당시 애틀랜틱은 워너에 합병되었다.) (뉴욕) 이스트사이드 헬리포트에 내리니까 한 무리의 리무진 버스들이 싣고서 보스턴, 필라델피아, 피츠버그, 뉴욕 등 동부의 해안 도시들을 따라 음반을 실어 날랐습니다. 애틀랜틱 사람들은 곧 법정 소송에 휘말릴 줄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우리 이름은 빌보드지에 부다 레코드와 계약한 것으로 나와 있었거든요. 우리가 어디와 계약했다고 나와 있는지 기억나시죠? 그 사람들은 우리 이름을 빼놓을 수 없었겠지요. 그런 걸 보면 (부다에서) 기술적으로 계약 조항을 이행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애틀랜틱을 찾아갈 머리는 있었습니다. 그러자 애틀랜틱에서는 음반을 들어보고는 “이거 대박인데.” 하더라고요. 애틀랜틱에서는 주말 내내 음반을 찍어가지고 모든 클럽에다 황급히 배송했어요.
그리고 이 사람들이 정말 똑똑한 게 있는데 지금 말씀드릴게요. 애틀랜틱은 빌보드에 (인기 동향을)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 모든 클럽에 음반을 가져갔어요. 당시만 해도 빌보드 댄스 차트는 레코드를 갖고 트는 DJ들이 빌보드지에 보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었거든요. 레코드 풀이 있기도 전이었는데요. (역자 주 – 언론계의 ‘프레스 풀’과 마찬가지의 방식. 음반 회사들이 프로모션 음반을 만들어 DJ에게 전달하면, DJ들은 대신 음반 회사에 피드백을 준다. 이러한 풀은 70년대 중반 미국 뉴욕에서 시작되었는데, 풀을 이끄는 사람을 ‘풀 디렉터’라고 부른다.) 우리는 ‘스튜디오 54’ (역자 주 – 디스코의 중심지로 여겨지던 뉴욕의 나이트클럽)로 가서 DJ를 하던 사람에게 돈을 주고 그 사람 이름을 써놓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썼어요. “쉬크의 ‘Dance, Dance, Dance (Yowsah, Yowsah, Yowsah)’” 거기에 우리 이름보다 더 큰 글씨로 “믹싱: 탐 새버레세 (mixed by Tom Saverese)”이라고 썼습니다. 당시 탐 새버레세는 유명했고 스튜디오 54는 디스코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사람 이름이 음반에 우리 이름보다 크게 써져 있으니까 다른 모든 DJ들이 앞 다투어 우리 음반을 틀려고 했습니다. 농담이 아녜요. 그 주가 다 지나가기 전에 애틀랜틱 레코드에서 낸 우리 음반에 탐 새버레세의 이름을 넣게 되었고요. 모든 DJ들이 그 음반을 틀어댔죠. 이제 우리는 적법하게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밴드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애틀랜틱 레코드와 계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첫 싱글 음반은 두 레이블 모두에서 플래티넘을 차지했지요. 부다와 애틀랜틱요. 우리는 부다에 메여 있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계약조항을 이행하지 않았어도 어쨌든 법적으로 그 사람들한테 묶여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그 사람들이 돈을 다 가져가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부다는 우리에게 로열티를 단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우리가 갇혀 있는 유리창 밖에 수백만 달러 정도가 쌓여있는 형국이었죠. 하지만 우리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애틀랜틱 레코드에서는 우리가 프로덕션 회사를 끼고 계약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음반이 뜨고 보니 프로덕션 회사에는 깡패처럼 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계약을 깨고 나왔죠. 그 다음 우리 처지가 어찌 되었겠어요? 차트 1위 음반을 끼고 앉았는데 합법적인 음반 계약이 하나도 없는 게 된 겁니다. 그래서 애틀랜틱을 다시 찾아가서 애틀랜틱과 직접 계약을 맺고 싶다 협상을 벌였죠.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손에 넣었고 모든 일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밴드고, 우리 음반이고, 모든 게 우리 것이 된 겁니다. 우리 인생이 그때부터 달라졌어요. 왜냐하면 이제 높은 양반과 직접 협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죠. 이제 A&R 같은 사람과 협의할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애틀랜틱은 우리가 스튜디오 54에서 보여줬던 마법이 항시 손아귀에 있어서 언제든 마법을 부리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실제로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롤링 스톤즈’의 음반 작업을 맡겼죠. 그때 우리는 겨우 24, 25살이었는데도 롤링 스톤즈의 프로듀서 일을 맡기려고 한 겁니다. (역자 주 - 나일과 버나드는 모두 52년생이나 생일을 기점으로 세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제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했던 가장 현명한 일이 바로 롤링 스톤즈의 프로듀서 일을 안 맡았다는 겁니다. 우리끼리 그랬죠. “이봐, 롤링 스톤즈를 프로듀스해서 히트곡을 만든다면, 사람들은 또 다른 롤링 스톤즈의 히트곡이라고 생각하겠지, 그걸 우리 음악이라고 생각하겠어?” 제가 애틀랜틱 레코드 회장님께 그랬어요. “저희는 롤링 스톤즈를 프로듀스하느니 회장님 비서를 프로듀스하는 게 낫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 회장님이 “뭐?” 그래요. 그래서 제가 “네! 제가 회장님 비서한테 히트곡 하나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정말로 곡을 써줄 수 있어요. 이 모든 빅 스타들이 회장실에 들어오는 데 저기 앉아만 있으니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비서분이 그 스타들보다 나은데요. 이런 심정을 담은 곡을 하나 써줄 수 있습니다. 그것도 회장님 회사에 있는 다른 모든 빅 스타들보다 더 좋은 곡을 써줄 수 있습니다.” 회장이 제 건방진 태도에 느끼는 바가 꽤 있었나 봐요. 이러더라고요. “뭐, 그럼 이건 어떤가? 서로 양보하자고. 내가 우리 회사 아티스트 목록을 줄 테니, 목록 중에서 비슷한 느낌의 그룹을 찾아보고 그대로 해보게.”
(2015/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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