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오 꿈의 나라 (1989)
특유의 방화 느낌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세련된 영화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영화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냐, 그런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용산 미군부대 근처에서 자라난 나에게는 어릴 적 봐왔던 풍경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어서 좋았다. 광주항쟁에 시민군으로 참여했다 동두천 보산동으로 도망나온 전남대생 종수, 그리고 보산동에서 미군물품을 암시장에 빼돌려 생계를 이어가는 종수의 고향 형 태호, 종수가 야학에서 가르쳤던 구두닦이 구칠, 이 세 인물은 당시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던 세계관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종수는 마치 <마의 산>에서 제템브리니와 나프타 사이의 한스 카스토르프를 연상시킨다. 전형적이라고 해서 평면적으로 유형화된 인물이 아니라, 인물 개개인이 스스로의 역설과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개인의 모순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서로 충돌하면서 파국을 맞는다. ( ★★★★)
32. 거미집의 성 (1957)
셰익스피어 <맥베스>의 무대를 전국시대로 옮긴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그것보다도 배우 미후네 토시로에게 직접 활을 쏘게 해서 대경실색하게 만든 일화로 더 유명하다. <맥베스>의 줄거리를 알고 있다면 딱히 새로울 것이 없다. 구로자와의 팬이 아니라면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을 영화다. 왜냐하면 그의 장기는 다른 영화에 더 잘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리어왕>을 토대로 만든 <란>이라든가. (★★★)
33. 레마겐의 철교 (1969)
옛날 영화의 CG 없는 물량의 스펙터클이 살아있는 영화. 레마겐 철교를 교두보로 삼아 독일 본토로 진군하려는 미 9사단 병사들과 철교를 폭파시켜 미군의 진군을 막으려는 독일군 간의 사투를 그리고 있다. 많은 영화와 게임에 영향을 끼친 전쟁영화의 고전이지만, 옛날 영화 나름의 상투성 때문에 2시간 동안 참고 보기 힘들다. 볼 거리가 없던 시절의 TV영화로는 좋았지만 이제 와서 지루함을 참고 보기에는 시간이 아까울 수 있다. (★★)
34. 신칸센 대폭파 (1975)
취향 저격 그 자체. 일본 영화 특유의 강렬한 캘리그래피가 박히면서 빡센 재즈훵크 연주에 추격 신까지 들어가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70년대 <타워링>, <포세이돈 어드벤처> 등 재난영화 붐을 타고 제작된 영화지만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내일을 향해 쏴라> 같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영향, 그리고 일본 범죄스릴러 영화의 제작역량이 집약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일본보다는 해외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스피드>에도 영향을 끼친 것처럼 보인다. 테러범이 신칸센에 폭탄을 설치했는데, 시속 80킬로미터 이하로 속도가 떨어지면 폭발하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만 달려야 하며, 그 때문에 폭탄 제거가 더욱 어려워진다. 그래서 영어제목은 'Bullet Train". 타카쿠라 켄, 소니 치바, 탄바 테츠로 등 당대의 명배우들이 모두 출연했다. 테러범을 악당으로 묘사하지 않고 사회모순의 산물로 그려낸 점이 주목할 만하다. 테러범이 될 수 밖에 없는 환경, 그리고 범인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인간미의 한 조각이 그를 파멸로 몰아간다는 점에서 단순한 재난 범죄 스릴러의 수준을 넘어선다. (★★★★)
35. 인사이드 맨 (2006)
'유주얼 서스펙트'의 아류작 같은 느낌. 펀자비 뮤직에 감상성을 강조한 유치한 인트로는 토니 스콧 영화를 연상시킨다. 은행 강도단이 인질에 섞여 들어가는 기발한 방식으로 나치 전범이 설립한 은행을 턴다는 이야기다. 스파이크 리 답게 소수자 문제를 건들기는 하지만 기발한 설정의 하이스트 무비 그 이상은 아니다. 덴젤 워싱턴, 조디 포스터, 크리스토퍼 플러머 같은 명배우들의 연기가 아까울 정도. 스파이크 리는 닉스 경기 그만 보고 제대로 된 흑인 영화를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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