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영어와 너무 멀어진 감이 있어, 마침 일이 끝나 한가하기도 하겠다, 밴드캠프에 실린 앤디 토머스의 "The Story of Leroy Burgess, Godfather of Disco Boogie" 기사를 번역해봤다.
르로이 버지스는 내가 오랜동안 사랑해왔던 아티스트지만 유명하지는 않고 해외 팬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는 뮤지션이다. 쉽게 말해, 좋으면 영원히 미칠 것이고, 싫어하면 영원히 싫어할 그런 곡들을 써왔다. 뉴욕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교주', '대부' 등으로 불리다가 이제는 '신'으로 불리는 사나이. 강렬한 비트와 입으로 내는 사이렌 소리, 감각적인 그루브는 사람을 몰아지경에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 신바람 이박사. 내한공연은 언감생심이고 다른 DJ들처럼 소규모 파티라도 열어준다면 전형적인 마인드 댄서, 월플라워임에도 불구하고 두 손에 경광봉과 호루라기를 물고서 환영하러 가고 싶다. 이 말을 20년이 넘도록 공언을 해왔건만, 일본 정도의 시장이 되면 모를까, 공식적인 내한은 요원할 것만 같다. 그저 오래만 살아주셨으면 좋겠다. 아니면 뉴욕으로 찾아가 뵙는 것이 빠를 수도.
"제임스 브라운이 훵크의 대부라고 한다면, 당연히 르로이 버지스는 최고의 디스코 부기 대부로 불려야 함이 마땅하다." 런던의 DJ 겸 프로듀서 애슐리 비들은 2001년 소울 브라더 레코드에서 발매한 <Leroy Burgess: The Anthology : Vol. 1>의 라이너 노트에서 이렇게 썼다. 전설적인 클럽 명곡들을 쏟아낸 작·편곡자로서뿐만 아니라, 가수, 키보디스트로서 버지스의 천재성을 모아놓은 2장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이제야 발매됨은 매우 늦은 감이 있지만 말이다. 그는 때로는 컬트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프로듀서 겸 작곡자 패트릭 애덤스, 그레그 카마이클과 함께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명(역자 주 - 르로이 버지스도 활동명이다.)을 써가면서, 80년대 중반부터 '부기'라고 불리는 신시사이저 기반의 미드 템포 스윙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버지스는 그의 음악을 듣고 자란 젊은 프로듀서들과 협업하면서 여전히 많은 곡을 발표하고 있으며, 루이 베가가 최근에 작업한, 그의 1981년 히트곡 "Let's Do It"처럼 예전에 만들어낸 명곡들도 재해석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고 있다.
1953년 뉴욕 할렘에서 태어난, 본명이 르로이 오닐 잭슨 주니어 Leroy O'Neil Jackson Jr. 인 이 사람은 아주 어려서부터 음악에 심취했다. "이게 다 클래식 훈련을 받은 성악가(콘트랄토) 머틀 벨 잭슨-버지스 여사,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의 목소리 덕분입니다." 버지스의 말이다. "세 살 때부터였나, 어머니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어요. 노래를 부르다 보니 관심이 피아노 연주 쪽으로 가더라고요. 여섯 살 무렵이 되어서는 음악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지요."
1968년, 버지스가 14살이 되던 여름, 친구 래리 뉴커크 Larry Newkirk로부터 그의 밴드 멜로우 소울즈 The Mellow Souls의 리드 보컬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뉴커크는 이 밴드의 미래를 밝게 보지 않았지만, 버지스는 달랐다. 먼저 밴드에 스튜어트 배스컴 Stuart Bascombe과 러셀 패터슨 Russell Patterson을 영입했다. 뉴커크는 밴드를 떠나기 전, 버지스에게 자기 누나 게일이 패트릭 애덤스라는 이름의 프로듀서와 사귀고 있다고 말했다. "그 누나가 패트릭에게 우리 밴드를 오디션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오디션 시간이 다 되어서야 패트릭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안 되겠다고요." 버지스의 말이다. "패트릭한테서 전화가 왔을 때, 제가 옆에서 델포닉스의 "Can You Remember"를 부르고 있었는데, 패트릭이 그걸 들었거든요. 그랬더니 바로 오디션 자리를 잡아주더라고요. 패트릭은 가수로서뿐 아니라 좀 미숙하기는 해도 키보디스트로서 제 재능을 바로 알아챘고 멘토가 되어주었습니다."
당시 패트릭 애덤스는 퍼셉션 레코드의 A&R (음반기획자)로 일하고 있었고, 퍼셉션의 소울 음악 전문 자회사 레이블인 투데이 레코드를 막 설립했던 차였다. 그는 버지스의 밴드를 품으로 끌어들여, 이름을 '블랙 아이보리 Black Ivory"로 바꾸고 음반 녹음을 위해 시그마 사운드 스튜디오 (역자 주 - 필라델피아 소울의 모태가 된 유명한 녹음 스튜디오)로 초청했다. 여기에는 버지스의 첫 자작곡이 실렸다. "제가 작곡한 건데, 'You And I"라고 1968년에 닷지 직업고등학교 강당에 있는 피아노로 한가한 시간을 틈타 멜로디를 써 둔 것이었습니다." 버지스의 회상이다. "스튜어트 배스컴이 나중에 정말 훌륭한 가사를 붙여줬어요. 그 결과물은 패트릭 애덤스가 편곡과 프로듀스를 해준 장장 7분 짜리 곡이었습니다."
1977년 무렵, 버지스는 환상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블랙 아이보리는 널리 정형화된 그저 그런 슬로 잼 밴드여서 아티스트로 성장을 계속하려면 음악 환경을 바꿔야 했어요. 르로이 버지스가 어떤 사람이냐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블랙 아이보리 활동을 중단하고 나서, 우리 멘토를 다시 찾아갔어요. 패트릭은 처음에 저를 백보컬 겸 보컬 파트 편곡자로 받아줬어요.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키보디스트 겸 편곡자로도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패트릭 애덤스는 피터 브라운이라는 사람과 함께 설립한 할렘의 P&P 라는 자신의 레이블에서, 직접 프로듀스와 편곡을 마친 컬트 취향의 디스코 음반들을 차례로 발표했다. 그것은 클라우드 원의 "Atmosphere Strut", 포 빌로우 제로스의 "E.S.P" 그리고 패트릭 애덤스의 수많은 활동명 중의 하나이자 스튜디오 밴드인 프릭 Phreek이었다. 프릭은 애덤스 휘하의 가장 뛰어난 뉴욕 디스코 신의 가수, 뮤지션들이 참여한 밴드로 애덤스가 당시 막 애틀랜틱 레코드와 계약을 성사시킨 바 있다.
"1978년에 패트릭한테서 곧 애틀랜틱에서 발매되는 프릭 앨범에 넣을 곡을 써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버지스의 말이다. "꿈속에서 "Weekend"의 멜로디가 떠올라서 벌떡 일어나서 펜더 로즈 앞으로 갔죠." 그 시각은 새벽 5시, 블랙 아이보리의 베이시스트 제임스 캘로웨이와 곡 작업을 하던 스튜디오에서였다. "제임스 형을 깨운 다음에 코드를 잡고 멜로디를 건반에 탕탕 쳐대기 시작했어요. 제임스는 잠이 덜 깬 채로 베이스라인을 잡아주었고요." 우리 둘이서 소형 드럼 머신을 써서 후딱 데모테이프를 만들었어요. 그다음에 바로 가사를 썼습니다."
이 곡이 마음에 든 패트릭 애덤스는 버지스와 캘로웨이를 엔지니어 밥 블랭크가 운영하는 전설적인 녹음 스튜디오인 블랭크 테이프스로 초대했다. 당시 그곳에서는 프릭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패트릭이 제가 지휘봉을 잡아도 된다고 처음으로 신뢰를 보여주었어요. 데모를 완성하자마자 돈을 쥐여주더니 줄리어드 음대 구내서점에 가서 빈 악보용지를 사서 집에서 곡을 써오라고 하더군요. 녹음 연습 때는 패트릭이 뒤로 빠지더니 저 보고 진행해 보라고 했어요."
가수 크리스틴 윌셔가 녹음한 "Weekend"는 애덤스의 레이블 PAP에서 12인치 싱글로 발매된 뒤, 나중에 '클래스 액션'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녹음되었다. 이 곡은 70년대 후반기의 위대한 디스코 곡일 뿐아니라 'PA 시스템'이라는 패트릭 애덤스가 이끄는 일군의 스튜디오 뮤지션들 사이에서 버지스의 입지를 공고히 해준 곡이었다. 게다가 버지스는 이 곡을 통해 밥 블랭크라는 엔지니어의 절묘한 솜씨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독보적인 블랭크 테이프스 스튜디오에서 밥 블랭크와 작업해 보는 경험은 프로듀서로서의 꿈이었죠. 그분은 오디오 엔지니어링에서는 엄청난 재능이 있었고 그 후로도 제 녹음을 직접 도와주십사 부탁했어요."
애덤스는 부다 레코드에서 블랙 아이보리의 세 번째 앨범을 내기 위해 블랙 아이보리 멤버들과 재결합했다. 그리고 이 밴드 최고의 히트곡인 "Mainline"이 여기서 나왔는데, 이 곡의 작곡과 편곡이 버지스의 솜씨였다. 1979년 발표곡인 이 곡은 선구적인 곡으로 드럼 브레이크만 봐도 80년대 중반 하우스 음악의 도래를 예언한 것이었다. 이 곡은 패러다이스 거라지(역자 주 - 전설적인 DJ 래리 르밴이 출연하던 뉴욕의 클럽)에서 모두가 열광하는 곡이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이 저나 우리 팀은 공연 있을 때 빼고는 패러다이스 거라지에 자주 가지는 않았었거든요. 근데 갈 때마다 거기가 뉴욕에서 가장 자유롭고 포용적이고 취향도 덜 까다로운 클럽이라는 걸 느꼈어요." "Mainline"이 히트한 뒤에, 버지스와 패트릭 애덤스는 프릭에서 기타를 쳤던 동료 프로듀서이자 편곡자인 스탠 루카스와 1979년 딜라이트 레코드 소속 뮤지션 대즐 Dazzle의 셀프타이틀 앨범에 참여한다. "패트릭 애덤스 프로덕션의 핵심 멤버들 사이에서 제 입지를 다지게 되니까, 패트릭은 저와 스탠 루카스에게 메인 프로듀서 역할로 대즐 프로젝트를 할당해 줬습니다." 대즐과 프릭, 두 작업을 통해 함께 녹음작업을 한 두 뮤지션, 제임스 캘로웨이와 소니 T. 데이븐포트 Sonny T. Davenport를 키워내면서 미래의 유용한 파트너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는 그레그 카마이클과 함께였다.
레프트필드 디스코(역자 주 - 실험적인 사운드를 구사하던 뉴욕 언더그라운드 훵크의 일종) 레이블 레드 그렉 레코드의 설립자인 그렉 카마이클은 이미 단골 프로듀싱 파트너인 패트릭 애덤스와 함께 유니버설 로봇 밴드, 범블비 언리미티드라는 이름으로 일련의 언더그라운드 명곡들을 발표해놓은 상태였다. 카마이클은 곡 하나에 쓸 리듬 트랙을 녹음하려고 버지스, 데이븐포트, 캘로웨이를 스튜디오로 초대했다. "우리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일을 다 끝내놓았는데 그렉은 하룻밤 내내 스튜디오를 예약해놓았던 터라 허송세월을 하느니 새로 곡이나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버지스의 회상이다. "해가 다시 떠오를 무렵이 되자, 프로듀싱 작업이 모두 끝났어요. 리듬, 신시사이저, 보컬 등등 모두요." 샘 와이스의 전설적인 샘 레코드에서 컨버션Convertion의 이름으로 발표된 곡 "Let's Do It"은 래리 르밴의 패러다이스 거라지에서 틀기도 전에 먼저 WBLS 방송국 DJ 프랭키 크로커의 방송 전파를 엄청나게 타버렸다. 이내 공전의 '부기'걸작이 된 것이다. 조금 느리게 진행되지만 그루브가 더욱 강조된 이 포스트 디스코 사운드를 부를 만한 이름이 당시에는 없었지만 말이다.
'부기Boogie'라는 용어는 런던의 DJ 조지 파워에게서 나온 말인데, 조지 파워는 소호의 전설적인 클럽 크래커즈에서 가장 춤을 잘 추는 댄서들을 가리키기 위해서 '부기 보이즈'라는 용어를 썼다. 이 용어는 80년대 초반, 웨스트엔드에 위치한 클럽 스패츠에서 데즈 파크스, 트레버 쉐익스 같은 DJ들이 이 말을 이어받아 사용하다 80년대 중반, '오리지널 부기 보이'로 불리던 DJ 폴 '트러블' 앤더슨 같은 사람들과 라디오 해적 방송(역자 주 - 공식 방송 면허가 없는 개인 운영의 방송국) 키스 FM의 노먼 제이 덕분에 런던 클럽 신에서도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가 되었다. "부지불식간에 부기는 그 자체로 장르가 됐고 저는 로그 LOGG 앨범과 'Let's Do It' 덕택에 (부기의) '왕' 칭호를 얻었죠. (역자 주 - 어느새 버지스는 다시 God of Boogie로 불린다.) 부기는 BPM (1분당 박자) 95에서 110 사이 어딘가에서 디스코보다는 더 들뜨지 않는, 업타운과 할렘에서 익숙하게 들리던 음악이었어요." 이런 1980년에서 1984년 사이의 포스트 디스코 곡들은 미국에서 엄청나게 발매되었지만, 영국 이외의 지역에서 "부기"라는 용어로 인식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다.
샘 레코드에 컨버션에 대한 예산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카마이클은 샐소울 레코드의 켄 케이어 Ken Cayre와 접촉했다. 이제 로그 LOGG라고 이름을 바꾼, 버지스가 보컬과 키보드를 맡고, 캘로웨이, 데이븐포트, 윌리스 롱으로 이루어진 밴드는 전 세대를 아울러 가장 위대한 부기 곡을 발표한다. 카마이클이 프로듀스한 로그의 1981년 셀프타이틀 앨범에 수록된 걸작 부기 "You've Got That Something"과 "I Know You Will"은 래리 르밴의 강력한 효과들로 믹싱 되었다.
샐소울과의 친분 덕에 버지스는 이너 라이프 Inner Life의 1982년 히트곡 "Moment of My Life"의 편곡자로 일하며 보컬인 조슬린 브라운 Jocelyn Brown이 참여하고 쉡 페티본이 믹싱을 마친, 12인치 킬러 트랙 "Heartbreaker"를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다. 버지스는 활동명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아주 많은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캘리버 Caliber라는 이름으로 버지스와 할렘의 같은 아파트에 살던 타하카 라 알림 TaharQa과 툰데 라 알림 Tunde Ra Aleem 쌍둥이 형제가 만든 새 밴드와 함께 처음으로 발매한 12인치 싱글이었다. 이들은 이름을 '알림'으로 정하고 "Hooked on Your Love"를 발표했다. 원래는 편곡자 겸 키보디스트로 참여하려고 하다가, 젊은 루서 밴드로스, 위대한 율랜다 맥컬러 Ullanda McCullough를 백 코러스로 삼아 그의 가장 뛰어난 보컬 기량 중 하나를 이 곡에서 들려주었다.
1985년에는 기념비적인 부기/일렉트로-훵크 트랙인 "Release Yourself"를 잇달아 선보였는데. 이 곡은 보컬 브레이크다운(역자 주 - 클럽음악에서 보컬 파트의 피치를 낮추거나 변조해서 인스트루멘털을 강조하는 행위로 추정)과 비트를 하나하나 드라마틱하게 매만지던, 패러다이스 거라지 DJ 래리 르밴의 명실상부한 대표 레퍼토리가 되었다. "'Release Yourself'로 시작해서 이 알림 집안의 쌍둥이는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를 가진 프로듀싱 기술에 도달했습니다. 이 친구들은 전통적인 어쿠스틱/전자음악 연주보다는 주로 전자 드럼, 퍼커션, 신시사이저들과 디지털 생성 음악 트랙을 사용했어요. 그 결과 후속 싱글인 'Get Loose'와 ' Confusion'이 나왔어요."
이 클럽 히트곡들로 애틀랜틱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1986년과 87년에 두 장의 앨범 <Casually Formal>과 <Shock!>를 발표한다. 버지스는 음악계에 환멸을 느낀 데다, 진정으로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던 장르인 힙합이 인기를 끌자 음악을 그만둔다. 하지만 그의 유산은 지속되었다. 역설적으로 "Eric B For President"나 래퀀Raekwon의 전설적인 앨범 <Only Built 4 Cuban Linx> 수록곡 "Criminology"와 같은 힙합 곡이 버지스의 곡을 샘플링한 덕택이었다.
2000년대 초반, 버지스는 녹음을 다시 시작했다. 첫 녹음은 필립 자르Philipe Zdar와 함께한 캐시어스Cassius의 앨범 <
Au Rêve>였다. 그 다음에 DJ 겸 프로듀서 쉐즈 다미에 Chez Damier와 팀을 이루어 "Your Love" 곡 작업을 했고 다수의 프로듀서들과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서부터는 은둔 생활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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