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쉬크 (CHIC)의 나일 로저스 (Nile Rodgers) 인터뷰

Baron Samdi 2016. 6. 25. 10:38
 
인터뷰 소개에 앞서.
 
전쟁사를 주로 다루는 Uesgi님의 다음 블로그를 자주 찾는데, 이 분의 블로그를 보면 느끼는 바가 참 많습니다. 역사를 전공하신 분이 아님에도 아주 좋은 자료를 소개하고 있는데, Uesgi님의 블로그로부터 얻은 교훈은 첫째로 원문 자료를 꾸준히 그리고 충실하게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알찬 내용을 꾸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밀리터리 히스토리>같은 외국의 자료들을 뛰어난 어학 실력으로 번역, 편집하고 개인적인 코멘트를 달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자료들이 국내의 사료들에 비해서도 꽤 알찬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둘째로 전문가연하지 않는 매우 겸손한 태도로 꾸준하게 소개한 포스팅들이 나중에 쌓이다 보니 적잖이 전문적이고 정확한 사료들의 저장고가 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소울 음악의 역사라든가, 훵크의 음악적 특색이라든가 이런 거창한 주제로 시작하다 보면 포부에 재능이 압도당해 곧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 빠지게 되고, 무력해지게 됩니다. 반면 Uesgi님의 블로그에서는 아주 사소한 주제로부터 시작했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아주 좋은 자료들이 저절로 쌓이게 되었고, 유일무이한 저장고가 되더라, 이런 마음가짐과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따라서 시간이 없는 직장인이기는 하지만 되도록 원문 자료를 읽고 좋은 자료는 소개해 보자는 마음에서 자료들을 뒤적이다가 미국의 소울 잡지 <왁스포이틱스>에 실린 나일 로저스의 인터뷰를 실어 봅니다. 이 인터뷰는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내용이 많고 70년대 말 뉴욕 훵크신의 분위기를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후속 인터뷰는 번역하지 않겠습니다. 쉬크나 나일 로저스에 대한 내용보다 다프트 훵크와의 협업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다프트 훵크에 대한 흥미도 별로 없다보니 의욕도 없지만 말입니다. 인터뷰는 읽기 쉽게 잘게 잘라 올리겠습니다. 너무 길면 흥미도 떨어지고 눈이 아프니까요. 지하철 같은 데서 읽기 좋은 분량으로 잘라 소개해보겠습니다.
 
누군가 제 블로그는 책과 같아서 두고두고 읽기 쉽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 말을 제일의 칭찬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문 자료들을 읽어보고 좋은 내용이 포착되는대로 바로 바로 소개하겠습니다. 자평하자면 제 영어실력은 정확성보다 스피드가 주를 이루다 보니, 빨리 번역은 하는데 정확성은 좀 부족합니다. 꼼꼼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고, 오역에 대한 지적이 있다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재미있게 읽어보시길! 
 
 

현대 댄스 뮤직계의 숨은 영웅 (unsung hero) 쉬크 (CHIC)의 프로듀서 겸 기타리스트 나일 로저스 (Nile Rogers)

 

왁스포이틱스55. “Hitmaker”란에 게재.

 

일억 장이 넘는 음반을 팔아치웠음에도 불구하고 나일 로저스는 여전히 대다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로 그가 의도한 바이기도 합니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의 왕성한 경력을 시작했던 때에도 나일은 가려진 그늘 속을 더 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일의 얼굴을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그가 쓴 곡은 잘 압니다. 나일은 함께 음악을 해왔던 소울 메이트인 베이시스트 버나드 에드워즈 (Bernard Edwards)와 함께, 록시 뮤직 (Roxy Music)의 섬세한 스타일과 (썩 어울릴 법해 보이지는 않지만) 키스 (KISS)의 신비함 (anonymity)을 결합시켜 쉬크를 결성했습니다. 버나드의 톡톡 튀는 베이스라인과 나일의 째지는 기타 연주소리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클럽과 방송망을 지배하면서, 일견 단순한 듯 보이지만 복잡한 형태의 디스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성공적인 방식을 다른 곡에도 적용하여, 지난 20세기 중 가장 기념비적인 대중음악이 이 2인조의 손에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Good Times”, “We Are Family”, “I’m Coming Out”과 같은 곡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즐기게 되면서 우리의 집단의식에 스며들었습니다.

 

“Rapper’s Delight”는 음악사의 경로를 틀어놓았지만 그것은 슈거힐 갱이 아닌 버나드의 베이스였습니다. 골판지 상자로 방을 만들어 가둬두면 나일은 어떻게든 히트곡을 들고 뛰쳐나올 사람입니다. 시스터 슬레지, 다이애너 로스, 마돈나, 데이비드 보위, 듀란 듀란의 최대 히트곡들과 가장 훵키한 곡들은 모두 나일과의 협업에서 탄생했습니다. 나일은 몇 년 전 발간한 그의 자서전 <Le Freak : An Upside Down Story of Family, Disco, and Destiny>을 통해서 말썽 많았던 어린 시절에서부터, 가까웠던 버나드 에드워즈와의 우정, 코카인 중독, 최근의 암으로 인한 정신적 혼란 등, 삶의 관한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본지(本誌)는 작년에 나일을 만났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당시 나일 로저스는 다프트 훵크의 작업에 쉬크의 마법을 불어넣고 있었습니다. 수년 간 여타의 아티스트들에게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본 인터뷰는 2012103일 수요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던 사이언 (Scion) 뮤직 컨퍼런스의 개회 만찬에서 자리를 함께 한 청중들 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다프트 훵크와의 협업이 있고 나서 20134월에 이루어진 후속 인터뷰 또한 본지 웹사이트에 실려 있으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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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스포이틱스 인터뷰어 (이하 ”) : 작년에 과감한 내용을 담은 자서전을 내셨는데, 거기에 선생님의 평범하지 않은 어린 시절이 나오던데요. 십대 시절 동안 티모시 리어리 (역자 주 -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이자 히피 운동의 거두, 환각 약물을 예찬함.)와 약물에 빠진 약물 중독자 부모님 밑에서 보냈다면서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이런 역경과 악조건을 다 이겨내셨습니다. 음악이 이 모든 것들을 헤쳐 나오는 데 구원자 역할을 해준 셈인가요?

 

나일 로저스 (이하 ”) : 저는 음악을 공립학교 시스템에서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클래식 음악으로 시작했지요. R&B와 대중음악에 빠져들었지만 말이죠. 이런 것들은 학교에서 배울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학교에서 이런 음악들을 연주하지는 못했지요. 저는 집에서 음악을 듣고 즐겼습니다. 원래는 뉴욕 태생인데, 7살 때 L. A.로 이사를 왔어요. 사람들은 제가 살면서 얻은 영예라든가 성취에 대해서만 아주 많이 물어왔었는데요. 제가 7살 때, L. A의 익스포지션 공원 근처에 있는 사우스 센트럴 지역에서 살면서 카톨릭 계열의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7살의 나이로 그 지역 학교 수업 빼먹기 전국 기록을 달성했죠. 무려 75일 연속으로 결석을 했던 겁니다. (웃음) 학교를 빼먹고 L. A 시내에 있는 어떤 지역에 자주 가곤 했는데, 사람들은 그 동네를 홍등가 (Skid Row)라고 부르더라고요. 거기에는 B급 싸구려 영화를 틀어주는 영화관이 있었는데, 카톨릭 학교에 가려고 가져온 돈으로 영화관에 가서 온종일 영화에 삽입된 음악들을 들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영화에 등급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애들도 어른들이 보는 영화를 볼 수가 있었어요. 다른 모든 영화들도 찾아보면서 아주 수많은 음악을 들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삶을 허비하게도 했지만 당시 삶이 외롭던 때에 일종의 목적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시 흔치 않은 카톨릭 학교에서 유일한 흑인 아이여서인지 박탈감을 심하게 느꼈어요. 그런데 제게 음악이 어쨌든 특별한 존재가 되어주었죠. 어려서부터도 그런 마음이 있었고요. 그래서 음악을 했고, 하고 또 했던 겁니다.

 

75일을 연달아 결석하고 나서 결국은 잡혔어요. 집에 오니 경찰들이 집에 와있고, 이 사람들이 저를 뉴욕으로 되돌려 보내버렸죠. 우리 엄마는 산후(産後)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어서 저나 제 동생을 매일 죽이겠다고 위협했거든요. L. A에서 지내다 보면 그 사람들이 엄마를 치료해주거나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러다 뉴욕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뉴욕에서 저는 음악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슴 속에 품게 되었어요. 제 내면의 삶을 지속시켜주는 힘으로 받아들인 셈이죠. 저는 매일 음악을 했습니다. 학교에도 열심히 나가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원래는 클래식 음악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연주되는 음악들은 재즈였어요. 그러다 보니 재즈 뮤지션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재즈 뮤지션이 되려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요. 재즈 뮤지션이 제대로 된 클래식 음악인이라고 봤던 거죠. 저는 작곡도 하고 오케스트레이션도 짜고 편곡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누구 밑에서 일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결정적인 기회를 잡게 되니, 돈이 바로 제 손으로 굴러들어왔죠. , 우리 두 사람 (나일과 버나드)은 계약을 따내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중개인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뛰어난 점이라면 이 모든 음반들과 어마어마한 커리어를 정말로 모두 제 손으로 일궈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신 같은 사람도 만나 얘기도 나누고. 이런 말도 할 수 있겠지요. “까짓꺼! 판 하나 내봅시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판을 내지요. 그게 다이애너 로스가 될 수도 있고 데이비드 보위가 될 수도 있고 듀란 듀란이 될 수 도 있어요. 아니면 어떤 면에서 자기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정말로 거물급의 인사가 될 수도 있는 거죠

 

 

- 다음 편에 계속. 

 

(2015/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