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쉬크 (CHIC)의 나일 로저스 (Nile Rodgers) 인터뷰 (2부)

Baron Samdi 2016. 6. 25. 10:39

일하면서 쉴 때 조금씩 번역을 하다 보니 좀 지체되었는데요. 이제 번역을 마쳤으므로 조금씩 퇴고해서 올리겠습니다. 이 인터뷰는 후반부로 갈수록 재미있습니다. 단 이번 포스팅에서 스크리민 제이 호킨스 일화와 관련한 부분은 제가 자서전을 읽지 않고 번역한 관계로 맥락을 잘 몰라서 오역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자서전이나 다른 인터뷰를 읽어보신 분이 계시다면 커멘트를 주시면 감사하겠고요. 아니면 이후에 제가 책을 구입해 읽어보고 수정하겠습니다. 맥락상 읽는 데 지장은 없을 테니 기다리실 분이 있을 것으로 믿고, 먼저 올립니다. 인터뷰 전편에서 나일이 B급 영화관에 가서 앉아서 음악을 들었다고 하는 부분을 저는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훵크 곡 중에서는 B급 영화들, 그 중에서도 공포 영화를 차용한 부분이 많이 사용되기도 하고, 훵크 아티스트들이 직접 기괴한 의상을 입거나 음산한 목소리로 음악을 이끌어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여타의 장르에서는 보기 힘든 부분입니다. 대부분의 흑인 가정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부모가 모두 노동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고 또 밤늦게까지 퇴근하지 못하고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을 것입니다. 가족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가 나머지 아이들을 돌보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 보면 심야에 형제자매들이 모두 겁에 질려 TV에서 해주는 공포 영화나 액션 영화를 보는 적도 많았겠지요. 마치 우리가 전설의 고향을 보고 공포에 떨었듯이 말입니다. 훵크 아티스트들이 이러한 공포 영화의 음향들을 선호하는 이유가 어쩌면 맞벌이 가정에서 자라났을 대다수 흑인들에게는 공통적일, 일종의 집단적 무의식에 호소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게 아니라면 흑인들에게 악몽같은 현실을 공포영화의 힘을 빌어 꼬집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이론적이거나 역사적인 분석은 아니고, 그저 읽으면서 느낀 제 잡다한 상상의 산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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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어마어마한 방식으로 업계에 발을 들어놓으셨네요. <세서미 스트리트> (역자 주 - <뽀뽀뽀>와 같은 미국의 아동 대상 프로그램)와 아폴로 극장 (역자 주 할렘 가의 유서 깊은 흑인 대상의 음악 공연장) 시절에 관해서도 얘기를 좀 해주실 수 없을까요?

 

당시 저는 클래식 기타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저희 선생님은 제가 줄리어드나 맨해튼 음대에 가기를 바라셨어요. 이 두 곳 모두 소위 말하는 심화 과정 (extension division)이 있었거든요. 기타가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끼는 악기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기타를 하려면 이런 심화 과정이 있는 학부에서 공부해야 돼요. 그래서 줄리어드에 갔어요. 멋진 곳이죠. 느낌이 좋았어요. 그러다 제 친구들이 많이 있는 맨해튼 음대로 건너갔는데, 거기서 어느 게시판에 붙어 있는 공고를 보았죠. <세서미 스트리트>의 연주자를 뽑는다는 오디션을 한다는 얘기였어요. 가서 오디션을 보고 첫 날부터 일하기 시작했어요. 제 인생을 바꿔놓을 변화가 이때 일어난 거예요. 한 일 년쯤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일한 다음에, 아마 그게 그 프로그램의 두 번째 시즌 (1971)인가 그랬을 텐데요. 로레타 롱이라는 여자가 프로그램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 여자 남편이 피터 롱이라고 아폴로 극장의 관리자였어요.

 

한 일 년 정도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일하고 나니, 아폴로 극장에서 자리가 하나 났어요. 칼로스 알로마가 데이비드 보위의 <영 아메리칸스> 앨범에 참여하려고 극장을 떠났거든요. 그런데 그때 저는 제 자신이 히피 (역자 주 여기서 ‘hippy’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hippie’가 아니라 ‘hipster’와 같은 뜻으로 봐야 할 것 같다.)라고 생각하면서 커왔어요. 그래서인지 제 몰골은 항상 괴상했습니다. 머리 모양도 괴상했고 아폴로 극장에 오디션 보러 갔을 때 제 머리색이 녹색이었어요. 아주 커다란 녹색 아프로 헤어였죠. 이런 머리를 말거나 땋는다고 칩시다. 일단 쇼가 시작되면 다 풀려요. 이 아프로 헤어가 크고 녹색이잖아요. 거기에 땀이라도 흘려 봐요. 이게 머리에 다 찰싹 달라붙는데. (웃음)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제 오랜 친구놈들이 저를 막 놀리더라고요. 왜냐면 제가 히피라고 하면서 큰 통굽 구두도 신고 있었고. 게다가 빼빼 말랐었거든요. 제가 극장 사람들을 모두 다 굽어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사람들이 이 건방진 젊은 친구한테 한 수 가르쳐줘야겠구먼.”하는 태도였어요. 연주를 해보라고 하는데 제가 악보를 잘 읽어요. 오프닝 공연이 스크리민 제이 호킨스였습니다. 저는 팔리아먼트-훵카델릭과 함께 하고 싶었는데요. 그 사람들 음악이 제 인생을 바꿔놓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팔리아먼트는 다음 주 공연이랍디다. 제가 참여한 첫 공연은 스크리민 제이 호킨스, 베티 라이트, 맥신 브라운이었어요. 저는 무슨 악보든지 다 해치우는 잘난 맛에 사는 젊은이였습니다. 내 앞에 던져만 놔봐라. 극장 사람들이 저를 내버려두면서 리허설도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제가 악보를 잘 봤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밖에 나가서 동네나 구경하러 다녔습니다.

 

극장 일을 하기 일 년 전 쯤부터 저는 흑표범 당에 얼씬거리곤 했어요. 흑표범 당의 사무실은 아폴로 극장의 코너를 돌면 바로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나 가보곤 했는데 흑표범 당의 인원이 만원이었기 때문에 항상 속이 상했었죠. 그래서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다시 극장으로 되돌아와서 의자를 빼고 앉아 있는데, 지휘자가 손을 쳐들더니 “I Put a Spell on You”의 연주를 시작하려는 거예요. 저는 그 노래는 전혀 몰랐거든요. 하지만 악보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보를 보면 됩니다. 별 거 아닌데요.” 저는 스크리민 제이가 쇼를 꾸미는 방식도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무대 오른 편에서 관() 하나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기대고 앉아있는데, 지휘자가 손을 쳐들고 빰빰빰빰하고 외치자마자 관 뚜껑이 벌컥 열리면서 스크리민 제이가 튀어나오더라고요. 이게 다 그 사람들이 짜고 하는 건데 저만 몰랐어요. 스크리민 제이가 튀어나오니까 저만 혼비백산했죠. 

 

당시에 제가 흑표범당에 홀딱 빠져있었다고 그랬죠? 소름이 확 돋으니까 앰프의 플러그를 뽑아들고 기타는 꼬나 쥐고 무대 왼편으로 뛰쳐나갔어요. 그런데 극장 사람들이 양편을 막아서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스크리민 제이 쪽으로 다시 뛰어갔는데, 사람들이 무대 반대편 쪽도 막아버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무대 앞쪽과 뒤쪽을 뛰어다니다가 으아 으아 으아 민중에게 권력을! 흑표범 당이여! 민중에게 권력을!” 이러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죠. 아폴로 극장의 모두가 (이 광경을 보고) 빵 터졌죠. 그런데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울고 있는 거예요. 분위기가 좀 숙연해졌는데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진심을 보여주었던 겁니다. 맞설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이런 말 아시죠? 저는 도망쳤어요. 무대를 마구 뛰어다니면서요. (웃음) 스크리민 제이는 (스크리민 제이의 기괴한 목소리를 따라하며) 해골을 덜그럭거리며 저를 쫓아오고 밴드의 연주는 격렬해졌어요. 밴드는 연주를 했고 우리는 다시 쇼로 집중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고참 연주자들이 저를 인정해줬고 저한테 R&B를 가르쳐주려고 마음을 먹었나 봐요. 형님들 말로는 기보법은 다 같을지 몰라도 해석하는 방식은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R&B는 클래식음악과는 다르고 재즈와도 별로 비슷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재즈하고 가깝다고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쯤 돼서야 저는 좀 겸손해졌어요. 조그만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고 연주를 했어요. 아폴로 극장의 전속 밴드로 얼마간 일하고 있을 때, 그때쯤엔가 버나드 에드워즈라고 제 인생을 바꿔놓을 만한 엄청난 친구를 하나 만나게 되었습니다. 버나드 에드워즈는 사상 최고의 베이스 주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본 중 최고의 뮤지션이기도 했어요. 그 친구와 저는 밴드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쉬크의 모태입니다. 이 이후부터 삶이 즉시 성공가도를 달리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부침도 겪었지요. 하지만 그 친구와 파트너가 되고부터는, 그리고 서로를 마음속에 품고부터 우리는 천하무적이 되었습니다. 계속 그런 생각을 해요. 스크리민 제이가 지금도 나를 쫓아다닌다. 이 친구가 내 곁에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쉬크의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에 대해서.

 

: 록시 뮤직과 키스 모두 쉬크의 콘셉트를 잡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 우리는 뉴욕에 살았는데 세상을 지배한 것은 훵크였어요. 바로 그겁니다. 그때 저는 이미 아폴로 극장에서 연주한 지 일 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팔리아먼트와 어울릴 수가 있었죠. 연주도 함께 했어요. 뉴 버스 (the New Birth)나 다른 모든 밴드들도 함께요. 꿈결 같은 일이었죠. 당시에 우리가 시도하던 것이 있었는데, 우리가 소피스토훵크 (Sophistofunk, 역자 주- 세련된 고급 훵크를 의미하는 Sophisticated Funk의 합성어로 보임.)라고 부르던 음악의 콘셉트를 잡아나가는 것이었어요. 만들어내기는 했는데 이게 아무 뜻도 없는 거예요. 카메오 (Cameo)라는 친구도 알았는데 그 친구들은 웨스트 코스트 풍의 음악을 하더라고요. 우리 첫 투어 공연은 카메오, 컨펑션, 루푸스 같은 밴드들과 함께였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들과는 다르게 해보고 싶었어요. 아무나 입는 옷들을 입고 나오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요. 이런 느낌이었죠. 우리는 뉴욕에서 산다. 우리는 좀 다르다. 저와 버나드는 뉴욕 시티라는 밴드의 반주를 맡았는데, 이 밴드는 탐 벨이 작곡해준 필라델피아 소울 풍의 히트곡이 딱 한 곡 있었어요. 2년 동안 이 밴드의 연주를 맡았죠. 마지막 공연은 런던에서 했는데 제 호텔 방이 도둑을 맞았습니다. 여권을 도둑맞아서 여권도 없고 돈도 없고 집에 갈 방도가 없더라고요. 밴드는 먼저 움직였고요. 그런데 뮤지션들이 다 그렇겠지만 여자 친구가 있으면 어쨌든 묵을 곳은 생기는 거잖아요.

 

그때 제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 여자 친구가 저를 그 집에 묵게 해주었습니다. 이 친구가 클럽에서 마담으로 일하고 있었는데요. 저보고 자기가 좋아하는 어느 밴드가 하나 있는데 와서 봐달라는 거예요. 당시 런던에서 저도 조금 유명했는데요. 제 연주를 보고 그 사람들은 저를 훵크를 연주하는 지미 헨드릭스처럼 생각하더라고요. 어쨌든 어느 날 밤엔가 여자 친구와 '록시 뮤직'이라는 이름의 밴드를 보러나왔어요. 그 밴드는 록시라는 곳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청중과 아티스트가 그렇게 함께 호흡하는 광경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전에 본 적이 없어요. 옛날에는 제임스 브라운, 팔리아먼트, 이런 사람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람들은 차원이 다르구나 이러면서 아티스트를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지요. 그런데 록시 뮤직 이 친구들은 마치 영혼의 촉수를 뻗어서 관객들을 만져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관객들도 매혹적이었고 록시 뮤직도 매혹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은 특유의 음색으로 넘실대는 것 같았어요. 전혀 다른 음악이었습니다. 훵크도 아니고 록도 아니고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것이었어요. 그런 것은 이전에는 경험해 본적도 없을뿐더러 들어본 적도 없어요. 한 말씀 더 드리자면 그 친구들이 연주하는 데가 록시라고 하는 싸구려 술집이었거든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젠장맞을!”

 

 

 

 

(2015/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