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obiographica

소울 음악과 사회주의?

Baron Samdi 2016. 6. 24. 11:22

소울을 정의하는 데는 다양한 의견이 따를 수 있다. 형식적 측면에서 (예를 들어, 리듬 앤 블루스와 가스펠의 결합, 일반적인 정의)에서 감상적 측면(예를 들어, 그지 장타령, 우리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정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설득력 있고 권위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흑인 문학의 거두인 랭스턴 휴즈의 정의일 것이다. 그는 소울을 "흑인 민중 예술의 총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소울이란 흑인 민중의 역동적인 창조성 위에 위태롭게 걸려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소울을 "형식적 측면"에서 파악하려 하지 않고 어떤 "흑인정신의 본질"로 파악하려 하는 것은 아마도 흑인 민족주의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음악에서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고 소울을 흑인 민중을 결집시키는 일종의 주술로 이용하려 하는 것 같다.  

 

물론 휴즈가 미국 공산당에 몸담았고 소련까지 방문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당시의 야만적인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적 폭력에서는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고 "흑인 민족주의"의 문제에서도 그러했을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의 모국 소련 내에서 나타나는 중앙 아시아계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은 그가 사회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울에 대한 정의를 생각하게 된 계기도 아마 이러한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폄하하려 하거나 부정하려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죽고난 뒤, 소울은 흑인 민중이 겪은 고난과 억압 그리고 분노를 표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여겨져 왔다. 마치 한민족의 "한"과 같이 말이다. 이는 반인종주의적 인종주의의 형태, 혹은 세습적 희생자 의식을 정당화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내 생각에는 소울은 대중음악 중 하나의 장르일 뿐이며 여타 장르의 음악들과 같이 형식들의 결합에 불과하다. 소울 전통을 잘 계승했다는 것이 소울 장르의 창법, 구성 심지어는 클리셰들을 얼마나 적절히 활용했는가와 같은 의미라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소울의 정의를 흑인성에 한정시킨다면 비흑인 뮤지션들이 구현해내는 소울 사운드를 무엇이라 지칭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소울을 굳이 하나의 정신적인 경향으로 승화시키고 싶다면 "흑인"이라는 역사적 희생양을 애도하는 일종의 위령제적인 음악이며 여전히 지속되는 야만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에 대한 공감 정도에서 그치는 게 나을 것 같다. 소울이라는 개념을 성급히 정의내리기에는 생각해 볼 여지가 아직 더 많이 남아있을런지도 모른다.

 

이렇게 갑작스레 소울의 정의를 꺼내 든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아소토 유니온, 윈디 시티 등의 드러머이면서 소울 칼럼니스트이기도 했던 김반장이 다함께가 주최하는 <2006, 전쟁과 혁명의 시대>에서 "소울 음악과 사회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소울 음악과 사회주의를 어떻게 관계지을 수 있을까? 사회주의적인 소울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소울이 원래부터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내포한 진보적인 음악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일까? 김반장의 예전 칼럼에서 읽은 바로는 소울이란 게 원래 흑인 노동요에서 파생되었으므로 소울이 노동대중과 친화성을 지닐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것이 지나친 낙관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논리는 주류 평론가들이 "록이야말로 하층 계급 노동자의 음악이므로 가장 진보적인 음악"이라고 하는 순진한 논리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누가 시청 광장에서 뻘건 옷을 뒤집어 입고 징징대며 <애국가>를 불러대는 윤도현을 진보적이라 할 수 있을까?

 

예술이 그 자체로 진보적일 수 있다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 다만 이데올로기가 예술을 어떻게 포섭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강연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음반 팔고 혁명 팔아 돈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무슨 사회주의냐? 사회주의자는 주둥이만 산 것 같더라." 그의 얘기는  "이 하얀 가루는 단맛이 나는데 단맛나는 것들은 다 이렇게 하얀 가루일 거야(이 사람이 사회주의잔데 사회주의자는 다 이사람 같을 거야)" 그뿐이다.사회주의자건 자유주의자건 아니면 파시스트건 정치적 견해에 앞서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점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사회주의자라 해서 항상 옳은 의견만을 내세우거나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자급자족적 경제에 의존해서 삶을 영위하는 사회의 별종이 아니다. 내가 우려하는 바는 그가 사회주의에 대해 행하는 비난이 아니라 그의 반지성주의, 순진한 비폭력주의 심지어는 새로운 옷을 걸쳐입은 냉전 반공주의다. 사회주의자는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혼란을 통해 더 큰 혼란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다. 그 혼란이 혼란스러워 나쁜 것이라면 그는 사전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러나 사회주의의 과오를 반성하고 그 이상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에는 동의한다.) 특정한 견해를 비정상적인 이유로(우리나라같이 뿌리깊은 반공주의 국가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이유로) 매도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김반장이 객쩍은 소리나 지껄이는 실없는 사람으로 보지는 않는다. 나는 그가 사회참여적인 음악인이라는 데에는 박수를 보내주고 싶고 그가 하는 몇몇 얘기에는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강연이 그와 그의 음악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족, 내가 롹보다 흑인음악을 희망적으로 보는 이유는 전자가 흑인 음악의 유산들을 지속적으로 착취해왔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가운데 어떤 치열한 예술혼의 승화 등으로 자신을 미화하려 한다면 후자는 음악의 이유가 단지 "돈벌려고", "성공하려고", "여자 꼬시려고"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데 있다. (가장 감동적인 예는 말을 잇지 못하다가 "그저 음악이 좋아서요"라는 말이다. 무학의 음악인이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설명할 수는 없는 것에 일생을 바쳤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독자는 눈물이 핑돌만한 감상에 젖어든다. 예술의 가장 탁월한 능력은 타인의 경험에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에릭 홉스봄이 재즈를 치켜세우는 이유는 그것이 디아스포라의 음악이며 자신의 땅에서 뿌리뽑힌 자들이 지닌 상처의 토로라는 점이다. 게다가 흑인음악이 교회적(물론 어떤 면에서는 부족적) 전통(Call & response)과 결합하면서 싱어가 부각되기는 하지만 흑인음악의 대부분은 여전히 연주자 개개인의 자발성에 의존하는 중심없는 음악으로 남아있다. 아마도 그게 나를 꾸준하고 설득력있게 흑인음악으로 끌어들이고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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