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katology 104

Bobby Nunn과의 독점 인터뷰

바비 넌과의 독점 인터뷰 80년대 훵크 레전드 바비 넌과 몇 년 동안 이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부기 80팀은 기어이 그를 캘리포니아에서 만나 대면 인터뷰를 가질 기회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이 인터뷰를 공유할 것이며 독자 제위의 마음에 드시길 바란다. 좀 더 상세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어디 출신이신지 그리고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되셨는지요. 제가 나고 자란 고장인 뉴욕주 버펄로에서 모두 시작되었지요. 예닐곱 살 무렵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요. 저는 키보드 같은 것에 끌리는 편이었는데 부모님이 억지로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죠. 악몽이었어요. 저는 그걸 배우고 싶었던 게 아니었거든요! 십 대 시절에 접어들면서 음악에 더 진지해졌어요. 아버지가 지하에 레코딩 스튜디오를 만들어 주셨고 우리..

"F"unkatology 2022.06.22

Leee John 인터뷰

평소에 음악 관련한 얘기를 할 일은 거의 안 생긴다. 가끔 비슷한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을 만나면 가끔 좋아하는 80년대 밴드에 대한 질문이 돌아오는데, 나는 영국 밴드 Imagination을 빼놓은 적이 없다. 온라인 쇼핑도 생소하던 시절부터 이들의 음반과 DVD를 영국에 별도 주문해서 들을 정도로 오래 좋아해 왔고, 내가 생각하는 '팝 역사상 가장 패셔너블한 밴드'이기 때문이다. 특히 리더 리 존의 카리스마와 뒤에서 문득, 문득 눈길을 끄는 애쉴리 잉그람, 에롤 케네디의 복장과 안무의 앙상블은 처음 봤을 때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예전부터 게이 댄스에 관심이 많은 이성애자로서, CCM 좋아하는 비기독교도로서 모순적인 취향을 가져왔기 때문에 화려한 복식 속에 80년대 브리티쉬 팝을 대표할 만한 사운드..

"F"unkatology 2020.09.09

Steve Arrington 인터뷰 - 3

스티브 애링턴의 인터뷰 마지막 파트입니다. 역시나 거장은 음악을 가리지 않습니다. 스트라빈스키에서 예스, 마하비슈누 오케스트라를 거쳐, 댐 훵크와 플라잉 로터스 같은 비교적 최근의 아티스트들까지 섭렵하는 취향이 놀랍습니다. 애링턴이 어릴 적에 마하비슈누 오케스트라를 오케스트라로 오해하는 대목도 재미있지만 훵크 아티스트가 직접 말해주는 훵크의 정의도 흥미롭습니다. 훵크의 정의에 대해서 본토 흑인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는 듯 합니다. 제임스 브라운이 처음 시작했고, 베이스와 드럼이 강조된 음악이다, 이 부분이 항상 공통된 내용입니다. 리키 빈센트같은 이들은 이렇게 헤비한 악기의 강조를 놓고 대지의 모신이나 일자의 유출 같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보이는데, 스티브 애링턴은 역시 목사..

"F"unkatology 2017.05.23

Steve Arrington 인터뷰 - 2

인터뷰가 길어 세 도막으로 잘랐습니다. 스티브 애링턴이 말하는 슬레이브 시절의 회고를 들어보니 슬레이브의 팬을 자처하면서도 당시 밴드 구성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반부에 들어서는 거의 인터뷰 같은 내용인데요. 어떻게 종교를 만나고 목사가 되었는지, 왜 다시 음악계로 복귀하게 되었는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당시 대중음악과 스티브 애링턴에만 관심 있는 분들은 건너 뛰셔도 무방할 듯 합니다. 질문자: 그러면 한창 활동하시던 시기, 그러니까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의 분위기를 보면 훵크도 변화하는 것 같던데요. 사운드는 점점 깨끗해지고 싱코페이션(당김음)이 더 들어가고 더 타이트해졌어요. 어떤 게 이런 경향을 주도했다고 보십니까? 애링턴: 제 생각에는 그저 모든 음..

"F"unkatology 2017.05.16

Steve Arrington 인터뷰 - 1

Steve Arrington이 이 나라에서 얼마나 알려져 있고, 또 얼마나 인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끓어오르는 팬심으로 번역해봤습니다.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기괴한 것에 끌리는 허영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스티브 애링턴 정도면 본토며 유럽에서도 훵크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고, 그의 구술은 훵크의 역사상 위대한 밴드 중 하나인 Slave와 당시 오하이오 훵크 신이 어땠는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훵크의 발전에서 지역 밴드간의 경쟁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흑인음악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요소였던 보컬이 시장의 요구에 따라 독립하게 된 이후로 밴드의 위상은 보컬의 백업 세션 정도로 격하되는 듯 합니다. 힙합에서 MC..

"F"unkatology 2017.05.11

Kashif 인터뷰 - 2

티스토리에 글이 안 써지는 불상사가 있어 업로드를 못 시켰는데, 여기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혹시 오래 티스토리를 사용해오신 유저분이 있으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부 어쩌다 자기 음반을 내던 분이 다른 아티스트들의 프로듀서로 일을 바꾸게 되신 거죠? 어째서 솔로 아티스트 활동을 관두신 건가요? 사실은 그 반대로 보셔야 합니다. 원래 저는 밴드 리더가 되려던 사람이다 보니, 스테핑 스톤 Stepping Stone이라는 빅 밴드를 꾸리고 있었어요. 모든 레코드 회사에 데모 테이프들도 보냈었고요. RCA의 로버트 라이트 Robert Wright가 제 데모를 듣더니, “에벌린 킹의 프로듀서 일 좀 맡아볼 생각 있나요?”하고 묻더라고요. 물론 몇 곡이..

"F"unkatology 2016.09.29

Kashif 인터뷰 - 1

지난 9월 25일 카쉬프가 사망했습니다. 모던 R&B의 비조, 소울을 현대화시킨 인물이라고 공식화된 표현을 사용하면 좀 딱딱한 설명이 되겠죠? 저는 그저 누군가 ‘R&B 음악’이라고 하면 ‘아, 그거!’하고 떠오르는, 바로 그런 스타일을 만든 사람 중에 한 명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좀 늦게 발견되었다는데, 사인은 그저 ‘자연사’라고 합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고인의 사진과 기사가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득 예전처럼 인터뷰를 좀 번역해서 올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실행에 옮겨 봤습니다. 저도 카쉬프의 히트 음반들, 그래봤자 대표작 3장만 소장하고 있고, 이런 사람이다 정도만 어렴풋이 알 뿐, 그 이상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소울과 훵크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F"unkatology 2016.09.28

Confection의 Josh Beagley 인터뷰

Soul Treaure.com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번역해서 옮겨놓는다. 전문을 번역한 이유는 짧아서 금방 끝날 줄 알았고 읽어보니 좋은 내용이 많아서다. 일독을 감히 권해드리고 싶다. 먼저 음악부터 듣고!! * 직독직역한 것이므로 오역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항상 자부하듯이 번역은 빠르나 퀄리티는 자부할 수 없으니 알아서 참고만 하세요! 번역을 하다보니 엄청 깁니다. ㅠㅠ 그리고 리더인 조쉬 비글리가 생각보다 연배가 있으시고 80년대 일렉트로 훵크의 후예라기보다는 생존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예를 들어 출생지라든가. 저는 1966년 호주 남부의 애덜라이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아버지인 피터 비글리도 음악인이었고요. 70년대 내내 록 밴드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분이었지요. A..

"F"unkatology 2016.07.01

R.I.P Maurice White (1941~2016)

대개 뮤지션들의 부고는 귀찮아서라도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는 편이지만 모리스 화이트의 부고는 뭐라도 한 마디 덧붙여야겠다. 왜냐하면 모리스 화이트야말로 20여년 전, 아무 생각없이 살던 초딩 하나를 훵크의 열락으로 이끄신 분이기에 그렇다. 그의 동생인 버딘 화이트가 소셜 미디어에 올린 부고를 시작으로 소울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매체들과 소셜 미디어에 그의 사망을 애도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버딘 화이트가 밝혔듯이, 모리스 화이트는 음악 작업에서는 그야말로 "투철한 완벽주의자"였다. 아마 그의 사망 원인인 파킨슨 병도 어찌 보면 음악에 대한 과도한 열정과 몰입, 그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흑인들은 흥이 많아서 음악을 잘한다"고들 하는데, 내 생각에 이 말만큼 인종주의적이고 ..

"F"unkatology 2016.06.25

르로이 버지스 인터뷰 -2

스튜어트 씨나 러셀 씨하고는 의논한 겁니까? 먼저 우리 부모님과 상의했어요. 아무래도 제 후원자시니까요. 그리고 그 다음에 스튜어트와 러셀을 찾아갔어요. 처음에는 안 믿더라고요. 제가 진심임을 알게 되니까, 부다에 남자고 설득하려고 하더군요. 하지만 떠나고자 하는 제 의지가 굳건했습니다. 그 친구들과 함께 해서는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어요. 밴드를 떠나서는 별다른 계획이 있었습니까? 1977년에 밴드를 떠나고 나서 일 년 남짓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곡을 쓰기 시작했고 블랙 아이보리에서 벗어나서 제 첫 번째 히트곡을 쓸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다시 패트릭 애덤스와 함께 하게 되면서부터죠. 패트릭은 뮤지크 Musique 같은 그룹들과 디스코 신에서 많은 작업을 하기 시작했어요. ..

"F"unkatology 2016.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