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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k> 2-22 - 앙갚음

앙갚음 반면 1973년까지 브라운의 개인적 삶은 이미 붕괴되고 있었다. 그는 음악 외적인 압박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는데, 6월에는 사랑하는 아들 테디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데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닉슨을 지지하게 되었으며, 국세청the IRS로부터는 450만 달러의 세금을 포탈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훗날 밝혀진 국세청이 브라운에게 행한 표적 세무 조사는 불법이었지만 그 당시의 브라운에게는 별반 도움이 못되었다.) 브라운은 두 영화(와 는 “프레드 웨슬리 앤드 더 제이비스”의 이름으로 발매가 되기는 했어도 그 해의 최고의 판매고를 올린 제임스 브라운의 앨범이었다. 스티비 원더나 마빈 게이, 혹은 제임스 브라운의 훵크를 사용하는 여타의 뮤지션들이 눈에 띠게 성공을 거둔 반면, 대부는 방송도 타지 못한 채..

"F"unkatology 2016.06.24

<Funk> 2-21 - 제임스 브라운 밴드 Pt. 2

1971년 봄 (콜린즈 형제가 탈퇴한 뒤) 프레드 웨슬리는 지체 없이, 그들을 대체할 인물을 찾았다. 밴드는 그들의 탈퇴를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 “새로운” 제이비스는 다시 지미 놀렌의 기타와 프레드 토마스의 베이스가 추가해 많은 솔로 앨범들을 녹음했는데, 이 앨범들이 나중에 랩 음악의 주요한 샘플이 된다. 1972년 첫 번째 제이비스의 앨범은 “Food For Thought", 루핑에 많이 활용되었던 "Pass the Peas", "The Grunt", "Gimme Some More" 그리고 "Escapism"이 수록된다. 이 모든 곡들은 연주곡으로 이따금 제임스 브라운의 즉흥적인 보컬과 리듬 섹션에서의 복잡하고 활기찬 그루브로 이루어졌다. 웨슬리와 메이시오 파커는 훵크 관악 솔로에서 새롭고 환상..

"F"unkatology 2016.06.24

<Funk> 2-20 - 제임스 브라운 밴드

제임스 브라운 밴드 THE JB'S 무대 위에서나, 음반 속에서나 제임스 브라운은 당연한 말이지만, 언제나 소울 브라더 넘버원이었다. 제임스 브라운은 밴드를 군대처럼 훈련시켰고 악보를 놓치면 벌금을 물렸다. 그리고 더 나은 수준의 연주를 독려하기 위해 소리를 질러댔다. 제임스 브라운은 냅킨에 곡을 쓰고, 관악기 주자들에게 콧노래로 음을 알려주고 나서 바로 그 날 밤 그 곡을 녹음했다. 가끔은 낡은 노래들이 새로운 곡의 주춧돌이 되는 법이다. 새로운 가사나 리프가 추가되기만 하면, 새로운 잼이 형태를 갖추게 된다. 창조적 감각과 훈련의 결합은 이 밴드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 멤버들은 지칠 줄 모르는 알프레드 “피위” 엘리스, 프레드 웨슬리, 메이시오 파커와 기타리스트 지미 “챙크” 놀렌Jimmy "Cha..

"F"unkatology 2016.06.24

<Funk> 2-19 - 크게 소리쳐라! Pt.2

“필요에 따른 어떠한 수단으로든” 자유를 쟁취하라는 브라운의 요청은 말콤 엑스를 따르고 또한 그의 죽음으로 좌절했던 흑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시인들이 흑인 혁명을 꿈꿀 수 있도록 했고, (브라운의 의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흰둥이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했고, 다음 세상이 아닌 지금 이 세상에서의 구원을 예비하도록 했다. 브라운은 그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혁명 시인인 우마르 벤 하산Umar Ben Hassan과 길 스캇 헤론Gil Scott-Heron에서부터 마빈 게이와 스티비 원더와 같은 발라드 가수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그 영향력은 지식인들에게까지 미쳤다. 60년대의 시인이자 활동가였던 래리 닐Larry Neal은 민중들에게 보다 더 가까..

"F"unkatology 2016.06.24

<Funk> 2-18 - 크게 소리쳐라!

이번 챕터는 제임스 브라운이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곡들을 발표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여기서 저는 개인적으로 제임스 브라운이 일종의 정치적 각성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은 그다지 옳은 견해가 아니라고 봅니다. 제임스 브라운의 이러한 곡들은 빈센트가 보는 바와 같이 흑인 민중에 대한 애착의 발로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그의 기민한 비즈니스 감각도 일정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크게 소리쳐라! 1968년 무더운 여름 내내 제임스 브라운과 그의 밴드는 캘리포니아에서 투어를 돌고 있었다. 그는 아직은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노래를 쓰지는 않았지만, 이전보다 더 강경한 정치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킹 목사의 죽음에 이어 6월의 인기있는 대통령 ..

"F"unkatology 2016.06.24

<Funk> 2-17 - 새 가방 Pt.2

훵크는 그렇게 계속해서 나타난다. 몇 날 밤을 콘서트 투어로 보내고, 녹음으로 하루를 마친 날이 여러 날 찾아오면서, 브라운은 “쇼 비즈니스 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그의 음악은 당연하게도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제임스 브라운은 그의 성공을 흑인들의 롤 모델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테네시 주 녹스빌,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조지아 주 어거스타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을 사들였다. 그는 베트남에서 자청해서 공연을 했는데, 이는 아시아에서 복무 중인 대부분의 사병들이 좋은 쇼를 볼 권리가 있는 흑인들이었음을 잘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인들의 미국에서 모순적인 성공을 거둔 흑인의 원형이 되었다. 브라운은 1968년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당할 때에도 투어 중이었다. ..

"F"unkatology 2016.06.24

<Funk> 2-16 - 새 가방

새 가방 제임스 브라운은 그가 속해 있는 레이블의 빈약한 지원에 모욕감을 느끼고 다른 레이블인 머큐리 레코드 산하의 스매쉬 레코드로 거취를 옮겼는데 이는 자신의 영향력과 일에 대한 타협을 모르는 성격 때문이었다. (프로토 훵크 스매쉬 히트곡인 "Out of Sight"가 여기서 녹음되었다.) 그러나 (킹 레코드와의 계약 이행에 대한) 법원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의 곡 목록은 두 쪽으로 갈라져 연주곡은 스매쉬에서, 보컬 곡은 킹에서 나오게 되자 그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정당성을 주장했고, 결국 계약 사항을 변경한 끝에 다시 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자유를 쟁취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그는 이 사건을 이렇게 평했다. “그리고 창의성을 발휘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법적인 문제가..

"F"unkatology 2016.06.24

<Funk> 2-15 - 대부 : 소울 파워

7장 대부 : 소울 파워 “우리가 이 세션을 마치고 나면, 사람들은 어디에서 훵크가 나왔는지 알게 될 겁니다.” - 제임스 브라운 제임스 브라운 제임스 브라운은 1933년 5월 3일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반웰 외곽 소나무 숲에 위치한 단칸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브라운이 4살이 되던 해 이혼했고, 그의 아버지는 어린 브라운을 부양하기 위해 그를 내버려둔 채 장시간 일을 해야 했다. 오두막집을 전전하면서 살던 그는 6살이 되자, 조지아 주 어거스타의 고모가 운영하는 매음굴로 이사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도박, 밀주 그리고 매춘” 사이에서 성장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그는 춤을 춰서 돈을 벌기도 하고, 구두도 닦고, 목화도 땄으며, 운동도 하고,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다 마침내 물건을 ..

"F"unkatology 2016.06.24

<Funk> 2-14 - 아프리카 (나를 다시 돌려 보내주오)

아프리카 (나를 다시 돌려 보내주오) 뉴 올리언즈의 음악은 아프리카에서 훵크를 하는 사람들에게 리듬의 광대한 균열을 열어보였다. 그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으며, 그동안 서양 쪽으로 귀를 기울였던, 대서양 건너 남 아프리카에서 모로코에 이르기까지의 아프리카의 뮤지션들은 훵크를 듣고 내면화해서 그들 방식대로의 훵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다재다능한 색소포니스트 매뉴 디방고Manu Dibango는 1972년 중요한 곡 “Soul Makossa"를 녹음했는데, 그는 자신의 음악에 훵크를 도입한 최초의 아프리카인 중 하나였다. 재치있는 아프리카 콩가 리듬에 점점 소멸하는 듯한 훵키한 리듬 기타와 그 위에 디방고의 흥겨운 애드립이 더해진 이 빠른 페이스의 클럽 히트곡은 훵크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미국의 흑인 ..

"F"unkatology 2016.06.24

<Funk> 2-13 - 뉴 올리언즈 사운드의 핵심

이번 챕터는 복문이 많아 번역이 좀 까다로웠는데 대체적으로 유명한 드러머 얼 파머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워낙 유명한 드러머라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AFN이나 미국 잡지에서 보신 분들도 많을 것으로 안다. 그에게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그가 말년에 펑크(훵크가 아니고) 밴드 크래커의 "I Hate My Generation"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했을 때, 밴드 리더 데이빗 로워리가 곡을 따라서 드럼을 좀 쳐 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그걸 처음 만들었단 말이다." 뉴 올리언즈의 영혼과 심장 (뉴 올리언즈 사운드의 핵심) (사진 : 얼 파머Earl Palmer 1924 - 2008) 미국 최남부 지방의 R&B는 흰 셔츠가 남부 사람들의 땀을 ..

"F"unkatology 2016.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