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iotheca

모리스 메를로-퐁티, <휴머니즘과 폭력>

Baron Samdi 2016. 6. 25. 21:36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폭력을 쓰기를 주저하는 것은 그들과 공모자가 되는 것이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확언컨대, 이 책은 올해 전반기에 읽었던 책 중에서 최고로 좋은 책이다. 그렇다면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내게 좋은 책이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나의 경험이나 사고와 합치되어 저절로 흡족함을 느끼게 되는 책이다. 이런 책은 읽을 때는 즐겁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둘째는, "나"라는 강고한 성벽에 스며들어서 인식의 지반을 뒤흔들어 놓고 섬광같은 깨달음으로 나를 후려치고 책이 제기한 문제를 나로 하여금 오래도록 곱씹게 만드는 책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후자가 좋은 책이다. 전자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뿐이지만 후자는 창을 통해 세계를 보며 그 창을 통해 나오면서 자신을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이 책은 정확히 내가 말한 후자에 해당한다. 그것도 아주 기묘한 방식으로 나를 뒤흔들어 놓는다. 그동안 나는 공산주의를 적대시하거나 경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추구하는 바가 얼마나 정당하든 간에, 폭력이란 것은 너무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폭력과 인간성의 성취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려준다. 메를로 퐁티의 글은 읽는 동안 나의 감성으로 하여금 비등점으로 치오르게 하고 나의 이성으로 하여금 결빙점을 향해 내리닫게 한다. 가슴을 뜨겁게 하지만 그 뜨거움으로부터 치밀함과 세밀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려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이로부터 과학이 태어난다."는 말을 독서행위에 적용한다면 이 책은 어쩌면 좋은 예가 되리라.  

 

메를로 퐁티가 이 정치 에세이를 쓴 것은 당시 프랑스의 정세와 관련이 깊다. (어느 책이 그렇지 않으랴) 2차 대전 후 프랑스 내에서 공산당은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았고 지성계 내외곽에서 (정치적 효과가 어떻든 간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또한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은 혁명의 조국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냉전이 격화될 무렵, 모스크바 재판의 자료가 공개되고 소련 체제를 비판한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와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이 발표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는다. <휴머니즘과 폭력>은 바로 쾨슬러의 책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의 요지는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자유주의적 가치를 휘둘러서는 안되며 공산주의자의 언어로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체제 내의 폭력은 공개적이고 프롤레타리아의 장기적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자유주의의 폭력은 은폐되어 있고, 그러하기에 더욱 가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사회 내에서조차 사문화된 가치로 공산주의 체제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은 공산주의 사회가 인민들의 빈곤을 가중시킨다는 데 있다. 하르코프의 만성적인 전력 부족 등이 공산주의 사회의 열등성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를로 퐁티가 보기에, 자유주의 사회의 부는 식민지 착취로 얻어진 것이다. 우리가 소비하는 스타벅스 커피의 원두를 따는 콜롬비아의 아동노동자는 농약에 의해 장애를 얻거나 사망한다. 발렌타인 데이에 주고받는 초콜렛의 원료인 카카오 열매를 따기 위해 가나의 노동자들은 채찍질을 당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풍요로움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는 자명하다.

 

그 다음은 꼴라보(대독 협력자) 숙청에 관한 문제다. 전후 프랑스에서는 나치 치하 비시 정부의 수반이었던 페텡 원수의 처벌 문제가 공론화된다. (아마도 친구인 사르트르와 카뮈때문에 천재 문학인인 동시에 꼴라보였던 로베르 브라지야크와도 관련될 것이다.) 게다가 페탱을 비롯한 꼴라보들의 선택이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기에 운명적인 것이었고 공산당을 비롯한 레지스탕스는 외국의 힘으로 운좋게 종전을 맞이해서 전후 프랑스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는 국민전선 당수 르펜의 오른팔인 브뤼노 골니쉬같은 네가시오니스트(<-관련뉴스)들의 주장 등으로 계승됨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나라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에게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자꾸 현재의 예를 드는 것은 메를로 퐁티의 현재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메를로 퐁티의 주장을  축약하자면, 레지스탕스가 얻은 현재의 정치적 영향력은 불분명한 미래에 희생하기로 한 그 선택이 가져온 것이 아닌가하고 하는 반문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쾨슬러의 또 다른 책 <구도자와 인민위원>에 대한 비판이다. 정치적 인간은 인민위원(혁명가)에서 구도자(Yogi,우리말로 도사. 인민위원에서 구도자로 전환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지하씨가 아닐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실천과 그것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하는 인민위원형 인간이 인간의 양심과 천부인권을 믿으며 영과 무한을 오가는 가능성을 지닌 인간에게 (<한낮의 어둠>의 프랑스어 판 제목이 바로 <영과 무한>이다. ) 수학 공식을 적용할 수 없다는 구도자로 변화되는 순간, 자신의 혁명가적 과거를 의문시하게 된다.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정치적 인간(혹은 맑스주의자)는 역사의 변증법 안에 열려있는 사람이다. 역사란 순탄한 진행이 아닌, 여러가지 전망들이 교차하는 정세Conjuncture"다. 따라서 인간이 다가감에 따라 역사는 변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역사의 본질적인 악의 속에서 선택을 내린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그가 베버를 차용해 설명하는 이른바 "책임 윤리"다. 좋은 목적이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치의 우연성이라면 행위자의 의도와 목적을 의도하는 "신념 윤리"보다는 결과와 정책적 효과를 중시하는 "책임윤리"가 강조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침묵도 타인에게 거악이 될 수 있음을 알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바로 정치적 인간인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순진한 비폭력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써 합법적 폭력과 테러의 차이에 대해 질문을 제기한다.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예를 보자. 팔레스타인 저항단체의 폭력과 이스라엘 군의 폭력은 하등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전자는 불법적 테러 행위라 비난받고 후자는 (영유권 보장을 위한)합법적 무력 행위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테러이고 어디까지가 무력행위인가? (여기서 강자의 승인은 유력하며 유엔이 내세우는 국제법은 무력하다. 그러나 국제법이 무력하다고 해서 폐기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다르푸르 대학살이나 보스니아 인종청소의 예와 같은 곳에서는 국제법의 역할에 대한 최소한의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폭력이 곧 절멸을 의미하는 상황 하에서는 그것이 어떤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메를로 퐁티는 이 책에서 방어적 정세에서 진보적이면서도 도래할 인간적 가치들을 위해서 그 자체로 지양될 수 있는 폭력을 옹호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가지고 있던 의문은 이렇듯 소련 체제를 변호하던(발문을 쓴 정화열 교수는 "설명"이라는 말을 썼는데 나는 전혀 납득할 수 없다.) 그가 6.25 전쟁(나는 한국 전쟁이라는 용어를 싫어하지만 "한국"이 지리학적 의미를 가진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을 계기로 공산주의로부터 몸과 마음을 돌리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을 책 말미에 가서 찾을 수 있었다. 사르트르의 회고에 의하면, 6.25 전쟁 이후 메를로 퐁티는 이 책의 입장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으며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고 한다. 그의 열정은 이 책을 기점으로 사그라들었지만 그것은 책이라는 결정으로 남겨져 현재의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책 자체는 유한하지만 책에 담긴 정신마저 유한할 수는 없다. 현재의 상황에 와서 메를로 퐁티의 주장이 여전히 설득을 뛰어넘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열정을 불어넣는 것은 그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가 "자유"와 "접두사가 붙는 또 다른 자유"의 전횡에서 아직까지 한 치도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사족,

 이 책에는 모라비언 대학의 정화열 교수가 한국어판 발문을 말미에 써주었다. <기호의 제국>의 발문도 써서 내게는 익숙한 분이고 정치철학의 대가라고 하니 나같은 문외한은 얘기에 앞서 조심스러워지지만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의 글은 해박한 지식으로 메를로 퐁티의 논지를 부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정 교수의 글이 메를로 퐁티의 글이 의도하는 바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릇, 남을 평가하는 글이라면, 더 나아가 남의 글에 더부살이할 글이라면, 최소한 그 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애쓰고 그 내적구조에 충실해져야 한다. 이는 내 얘기일 뿐만 아니라 메를로 퐁티가 그의 책 전체에서 얘기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공산주의를 평가하려면 자유주의적 가치들을 휘두르지 말고 공산주의자의 언어와 시각으로 보아야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내재적 접근"이다. 그러나 정 교수는 스탈린 체제에 이어 킬링 필드를 예로 들면서 메를로 퐁티를 폭력의 맹목적 옹호자로 몰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자. 스탈린 체제의 존재론적 근거는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킬링 필드의 주범은 과연 폴 포트인가? 죽창과 비닐 봉지를 든 폴 포트와 워싱턴에서 폭격 명령을 내리는 닉슨과 키신저의 차이는 무엇인가? 또한 정 교수는 메를로 퐁티가 폭력의 상승적인 악순환을 경시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폭력의 연쇄를 멈추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마틴 루터 킹은 말년에 이르러 폭력을 고려했을까? 투키디데스는 왜 평화는 곧 무장평화라고 했을까? 폭력과 비폭력 사이에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면 메를로 퐁티의 철학이 성립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정 교수의 대안은 무엇인가?

 

어처구니없게도 이 노교수가 내세우는 대안은 카뮈적 반항이다. 폭력보다 대화를 앞세우자는 바흐친적이고 화이트헤드적인 윤리다. (어쩌면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 옳았을 지도 모른다.) 절대적으로 폭력을 거부하고 정신적으로 반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은 대화할 권리가 없는 자, 반항할 수 없는 자의 필연적인 선택이다. 그 또한 폭력을 비판하기 위해 은폐된 폭력이 양산해낸 가치들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폭력은 폭력적이기 때문에 나쁘다. 마치 세탁조의 빨래감이 돌아가듯, 그는 책과 함께 돌아간다. 순환 논증의 고리를 끊을 힘이 내가 보기에 늙은 그에게는 없어 보인다. 카뮈적 반항이라는 것은 노벨상 상금으로 고급 스포츠카 사서 하늘로 날아간 카뮈의 죽음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그게 카뮈적 반항이다. 그리고 카뮈적 반항과 화이트헤드적 윤리의 당연한 귀결은 미국식 자유주의의 옹호, 미국적 헤게모니의 전세계적 관철이 될 것이다. 이라크 민중의 아우성이 들리기에 펜실베니아는 너무 안온하고 풍요롭다. 그의 요리를 빛내기 위해 오늘도 마그레브와 브라질의 어린이는 과잉노동에 시달릴 것이다. 정 교수의 글이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책이 내포하는 원래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무용한 것이며 허식에 불과하다. 그의 지식은 고금을 넘나들지만 정작 그의 일상이 무엇에 의해 구성되는지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모른다. 나는 정 교수의 발문이 메를로 퐁티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심어놓지나 않을까 저으기 염려되고 한편으로는 나같이 순진한 독자도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니 역자와 출판사의 무책임이 한탄스럽다. (이럴 때 지식의 효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데, 혹자는 이것을 "우리 그냥 무식하게 살게 내버려 두세요!"로 쓰고 있다는 것은 개탄할 만 하다. 사실 누가 누구에게 배움을 강권할 수는 없으나 뒤얽힌 인간 사회에서 개인의 무지는 지구 반대편의 거악을 키우는 데 일조한다. 배우고 익히고 생각하고 해서 책에 나온 바에 따르면 "고관대작의 술책과 대항술책을 판단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민주주의와 실질적 자유의 관건인데 우리는 그러한 것으로부터 자발적으로 혹은 타성적으로 유리되어 있다. 알고 알게끔 하는 것, 그것은 인간의 책무가 아닌가. 그리고 정치적 인간이란 그의 책 전체가 예증하는 것처럼 "분노로부터 과학이 태어나도록"하는 사람은 아닌가....)

 

(2006/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