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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프 엘리슨, <보이지 않는 인간>

Baron Samdi 2016. 6. 25. 21:45

랠프 엘리슨. <보이지 않는 인간>. 범한출판사.

 


눈 속에 내장처럼 흩어진 이분의 가재도구를 보세요. 이분의 일체의 노동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입니까? - 269 페이지

 

그들은 살고 있지만 죽은 것과 마찬가지요, 삶의 죽음...대립물의 통일 - 283 페이지

 

지금까지 그들이 나를 받아들여 준 것은 피부색에 대해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알고 보니 그들에게는 피부색 뿐만 아니라 인간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하나이면서 다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 493 페이지

 

"beautifully written but too much violence in it...."

 

역자가 출판 허가를 얻으려고 미국 공보부에 엽서를 띄우자, 그에 대한 회신의 일부다. 그 당시 미 공보부에서는 미국 작품을 번역하는 번역자에게 출판에 필요한 종이를 제공하고 있었다고 한다.

1914년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난 엘리슨은 원래 재즈 뮤지션을 꿈꾸었으나 흑인 참여문학의 거두인 리처드 라이트의 권유를 받고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소설을 읽고 난 감상은 뭐랄까 개운치 못한 구석이 있다. 나는 소설을 현학적인 취미로나 혹은 문학비평을 목적으로 읽지 않는다. 단지 재미로 읽는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건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로브그리예의 <질투>를 읽고 있었을 때의 고통이란...) 그런 재미의 측면에서 이 책은 결코 짧지 않은 흑인문학의 역사 속에서 길이 남을 역작이자 미국 전역의 독자들이 선정한 2차대전 이후 최고의 책이라고 할 만하다.

"보이지않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노동력만으로 존재하던 당시 흑인들을 지칭할 수도 있고 어쩌면 깊게는 소설 속에 구현된 인물들이 드러내는 모순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 세계를 변화시킨다면서 경직된 태도를 보이는 자들,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하는지조차 모르는 자들, 모두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름조차 붙지못한 주인공이 자신을 일컬어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고 한 것은 존재하되,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나타낸 것 같다. 주인공은 남부에서 흑인대학을 다니다 뉴욕에 올라와서 "브라더후드"라는 단체의 가두 연설자로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조직 내의 알력과 동지의 죽음 등의 사건으로 조직에 환멸을 느껴 점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간다.

브라더후드는 당시 미국 공산당의 은유이거나 산하 단체의 은유인 듯 한데 엘리슨 또한 라이트의 권유로 미국 공산당 CPUSA 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고 한다. 당시 흑인 지식인들은 미국 공산당과 많은 연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당이 인종주의적 폭력에서 최대한의 방어막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30년대만 하더라도 흑인 노동자들의 조합 가입률은 백인 노동자에 비해 상당했고 할렘만 하더라도 천 명 이상의 공산당원이 활동 중이었다. 하지만 대다수 흑인민중들은 기독교나 마커스 가비 류의 흑인 민족주의에 의지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가비는 흑인 지식인들을 피부색이 옅다고 해서 흑인민중을 조종하는 기회주의자 등으로 폄하했는데 흑인 민중들의 반지성주의가 바로 이러한 데서 연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흑인 문인, 지식인, 음악인 등은 민족주의 세력보다는 공산당 계열에 친화성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국 공산당 내부의 팽배한 교조주의와 뉴딜 정책에 영합하는 대중주의 노선에 환멸을 느껴 흑인 사회에서 탈퇴자가 속출한다. 반면, 대다수 흑인들은 아버지같이 자상한 루즈벨트와 온정적인 뉴딜을 환영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주인공은 흑인 민족주의 세력과 갈등할 수 밖에 없었고 브라더후드 내에서 표출되는 모순에도 적응할 수 없게 된다. 그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소요 중에 숨어들어간 지하에서 점차 모습을 잃어가는 것이다.  정체성을 잃어가는 인간, 어떠한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인간, 모든 것을 다 털어낸 잔여만로서의 인간, 그것이 보이지 않는 인간이며 랠프 엘리슨 자신이다. 책 중반에서 주인공은 자신에게서 대중의 어떠한 부분이 "사멸해버렸다"고 표현한다. 위선적인 백인 이사와 흑인 총장을 통해 평생의 업으로 생각했던 학생으로서의 자신이 사멸해버리고 혁명 단체에 가입함으로써 흑인 민중의 민족주의적 열정이 사멸해버리고 동지의 죽음과 조직과의 갈등으로 혁명가로서의 자신이 사멸해버리고 마지막에 와서 보니 남는 것은 인간이더라. 엘리슨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결국 이러한 소거적 유형의 휴머니즘일 뿐인가? 나는 주인공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는 모른다. 다만 재미로만 책장을 덮기에는 더 생각해 볼 여지랄까 하여간 찜찜한 구석이 많다.

 

 


이글루스 가든 - 2주일에 책 한 권씩 읽기

 

(2006/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