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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 <역사> 외

Baron Samdi 2016. 6. 25. 21:49

헤로도토스 저. 박광순 역. <역사>. 범우사.




요즘에 와서 고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나의 배움이 체계없이 부유하고 아직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도 고전에 대한 등한시와 진지함의 결여 때문이리라. 현대 철학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고 알려고자 하는 사람은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철학은 근대 철학에, 근대 철학은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있어야 한다. 누구나 들뢰즈를 말하고 아무나 푸코를 들먹일 적에, 나는 "고전으로 되돌아가" 다시금 배움의 지반을 단단히 하고자 한다. 데리다의 말을 빌자면 나 또한 시대착오적인 것의 정치적인 장점을 믿으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그것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어, 인식의 차원을 확장하고 사건과 사안을 이쪽 저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부감하려 할 때, "고전"은 나의 힘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헤로도토스는 소 아시아의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나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역사가다. 흔히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이전의 역사서술이 에포포이오스(시인)들에 의해 행해졌다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헤로도토스는 역사 서술의 있어, 로고그라포스(산문가)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로도토스가 이후의 투키디데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투키디데스는 훗날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술이 독자의 기호에 영합하는 것이며  이와 반대로 역사가는 영원히 전승시켜야 할 것만을 기술해야한다는 자신의 엄격한 역사 서술에 대한 규범에 빗대어 헤로도토스를 비판한 바 있다. 투키디데스가 역사 서술관을 확립하기는 했지만 호메로스 류의 신과 인간이 혼재한 역사, 뮤즈의 힘을 빈 역사에서 (신의 개입이 신탁으로 일어난다 하더라도) 최초로 신의 영역에서 인간 사이의 진실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헤로도토스는 널리 알려진 대로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하다.

역사, 즉 History는 "탐구한다"는 말로 소송 사건에서 양측의 주장을 심리해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가려내는 판관 Histor에서 유래했다. 헤로도토스 출현 이전에는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의 시적 서술이 주를 이루었지만 헤로도토스의 출신지가 소아시아였던 관계로 페르시아, 이집트 등의 영향으로 문화적으로 각성되어 있었고 이는 그의 역사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점에서는 마틴 버낼의 <블랙 아테나>를 보아야 할 것 같다.) 따라서 그가 이 책 <역사>를 서술하게 된 목적은 1권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와 페르시아과 왜 싸우게 되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얼마 전 읽은 <아라비안 나이트> 또한 동서 문명의 충돌을 그리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서구인(프랑크 인)이 사악한 흉계를 꾸미는 야만인으로 묘사된 반면, 이 책 <역사>는 서술 시기가 아라비안 나이트보다 1600년 가량 앞서는데도 페르시아와 그리스 간의 전쟁을 (물론 그 유명한 "헤로도토스의 악의"를 감안하더라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묘사하려고 했다. 이 책을 소개하면서 어렵고 딱딱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많거나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 책 또한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의 기호에 영합한다는 투키디데스의 비판이 뒤따른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투키디데스보다는 부드럽게 읽힌다.)

이 책은 아홉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처음에는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의 발흥을 다루고 이집트와 그리스 각국의 역사, 문화, 풍속을 부기하고 있으며 끝으로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다리우스)와 아테네가 맞붙은 마라톤 전투, 크세륵세스와 그리스 연합군의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 플라타이아 전투, 미칼레 전투로 끝을 맺는다. 크세륵세스의 그리스 침공과 각종 전투 등은 흥미진진해서 책장을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게 하는데 특히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레오니다스와 스파르타의 300인 결사대의 항전으로 유명하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는 고전학자로 하여금 스파르타인과 아리아인의 유사성에 대해 연구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아무런 혈연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라는 스파르타인의 특징을 통해서 제3제국 성립의 역사적인 근거를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또한 이 책의 백미인 살라미스 해전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그리스와 동방이 격돌한 것으로, 해군력을 앞세운 아테네는 이 해전으로 인해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

내 생각에 이 책이 <반지의 전쟁>의 모티브를 제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강자에 대한 약소자의 연대, 그리고 우연의 결합으로 대역전극을 이루어내는 것들이 유사하지 않나 싶다. 사실 이러한 요소보다 대중으로 하여금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역사>에 나오기는 하지만 강자에 대한 약자의 승리는 실제 역사에서는 드문 일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은 박 광순 교수가 펭귄 클래식을 대본으로 해서 번역한 중역본이다. 중역본이기는 하지만 충실한 서문과 주석이 달려 있고 매끄럽게 읽힌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는 달리 책 앞 뒤 장에 나와있는 그리스 소아시아 전도다.  얼마 전 플루타르코스의 그리스 어 원전 번역이 나왔는데 이 책 또한 그리스어 원역으로 다시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

그 외, 읽었지만 독서 일지를 못 쓴 책들.

1. 서우석. <음악현상학>

서구의 기보법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 훵크의 음악적 우수성을 대변해 준다는 (어쩌면 흑인 사회에서도 뿌리깊은)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이 책을 보아야 한다. 이는 후에 자세히 다루고 싶다.

2. 로버트 에스프레이. <세계 게릴라 전사> (전 4권)

다리우스에 맞선 스키타이 게릴라에서 월남전까지 모든 형태의 게릴라전을 다뤘다. 어영부영 4권 다 읽기는 했는데 소장할만한 가치도 별로 없고 남에게 권할 만한 책도 아니다.

3. 앨런 실리토. <화려한 출발>

영국 피카레스크 소설의 전형으로 하류 계급 젊은이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다.

4. 리처드 버턴. <아라비안 나이트> (전 10권)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버겁지만 한 번쯤은 도전해 볼만하다. 유명한 이야기들도 많지만 이슬람의 종교관, 우주관, 여성관, 사회관 등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있다. 그리고 알리바바와 알라딘은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프랑스 판에서 번역자가 만들어낸 얘기다.

 

(2006/8/17)